부산에서 평양냉면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밀면부터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한국전쟁 때 이북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이 냉면을 먹고 싶은데 메밀 구하기가 어려워지자, 대신 미군의 원조로 들어온 밀가루를 이용해 부산에서 밀면이 탄생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맛집 검색 플랫폼 ‘다이닝코드’에 따르면 부산의 밀면집은 무려 880곳에 달한다. 부산에서는 이처럼 밀면 문화가 크게 발달하며 전통 냉면은 상대적으로 약세를 보였다. 냉면의 맛과 모양도 오늘날 냉면이 발달한 서울과는 차이가 생겼다.
1953년에 문을 열어 오랫동안 부산의 냉면을 대표해 온 원산면옥도 마찬가지다. 경희사이버대 외식조리경영학부 이승훈 겸임교수는 지난해 부산의 냉면집들을 둘러본 뒤 “원산면옥 냉면은 외관부터 서울의 일반적인 비주얼과는 궤를 달리한다. 쫄깃한 면에서 메밀의 흔적은 느끼기 힘들고, 달착지근한 육수에서는 한약재가 들어가 밀면의 느낌이 난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부산에서 냉면 면발은 대개 질기고 탄력이 있었다. 육수 맛도 진한 편인 데다가 단맛과 감칠맛도 강했다. 부산의 고깃집에서는 한동안 칡가루와 밀가루를 혼합해 만든 쫄면처럼 질긴 칡냉면이 유행하기도 했다.
반면에 서울의 평양냉면(이하 ‘평냉’) 면발은 메밀 비율이 높고 육수는 담백해 ‘슴슴하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새콤달콤한 밀면에 익숙한 부산 사람이 서울 평양냉면을 먹으면 “이걸 무슨 맛으로 먹느냐?”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부산의 냉면집들은 부산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냉면을 변형시켜 서울의 냉면과는 상당히 다른 스타일로 발전시킨 것이다. 그래서 음식사 연구자들은 “부산에서는 밀면과 냉면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형성한 부산형 냉면 문화가 발달했다”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부산에서도 일찍부터 서울의 평냉 맛을 접하고 좋아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서울에 볼일이 있으면 우래옥, 을밀대, 봉피양 등 유명 냉면집에 반드시 들러 냉면을 한 그릇하고 돌아왔다. 이들은 ‘밀면 천국 냉면 지옥’이라 불리던 부산의 현실을 못내 아쉬워했다. 2010년대 후반이 되며 전국적으로 평냉 열풍이 불었다. 2018년 남북정상회담 당시에 북한의 김정은이 평양의 유명 냉면집인 옥류관 냉면을 서울로 보내면서 평냉이 큰 화제가 된 것이다. 이전까지 냉면이 주로 실향민이나 중장년층이 찾던 음식이었다면 ‘평냉’이 방송과 SNS에 자주 등장하면서 20~30대 젊은 층까지 냉면 맛집 순례에 합세했고, 냉면 전문점이 전국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밀면 문화가 워낙 강했던 부산에서도 서울만큼은 아니었지만, 평냉을 찾는 사람이 늘고 새로운 냉면전문점이 속속 생겨나기 시작했다.
거대곰탕의 평양냉면.
부산에서 본격적인 서울식 평냉의 출발점은 2013년 해운대에 프리미엄 고깃집으로 문을 연 ‘거대갈비’로 볼 수 있다. 당시 거대갈비는 식사 메뉴에 부산에서 처음으로 순메밀 100% 물냉면을 선보였다(지금은 80%로 바뀌었다). 거대갈비의 물냉면은 입에서 툭툭 끊어지는 메밀면과 우래옥처럼 육향 깊은 육수로 부산의 평냉 마니아들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하지만 냉면을 먹기 위해 부담해야 하는 고가의 고깃값이 걸림돌이었다.
거대갈비는 2018년에 평냉을 메뉴에 넣은 두 번째 브랜드 ‘거대곰탕’을 출시하며 평냉 마니아들의 부담감을 덜어줬다. 제육이나 수육으로 소주 한잔하며 ‘선주후면’하거나, 가볍게 평냉 한 그릇만 할 수도 있게 만든 것이다. 거대곰탕은 지난해 서울 강남역 근처에 서초점을 열고 서울에도 진출했다. 진한 곰탕과 평냉으로 냉면에 자부심이 큰 서울 사람들까지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거대갈비 김유철 대표는 “내가 좋아하는 평냉이 부산에 없어서 시작했지만 5~6년은 욕을 진짜 많이 들었다. 하지만 없는 걸 공급하는 게 우리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평냉이 우월하니까 먹으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이런 음식도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해운대 거대갈비, 해운대와 서면의 거대곰탕에서 냉면을 맛볼 수 있다.
담미옥의 평양냉면.
‘담미옥’은 2024년부터 미쉐린 빕구르망에 선정되며 부산에서 평냉의 신흥 대표 주자로 자리 잡았다. 담미옥은 7년 전 부산진구 개금동에서 문을 열었다가, 지난 4월 중구 중앙동으로 이전했다. 이전한 지 두 달도 못 되었지만 20~30대 젊은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이면 줄 서는 맛집이 되었다. 서울의 일반적인 평냉 스타일과 가장 닮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메밀 80% 면을 사용하는데, 5000원이 비싼 100% 순면도 있다.
담미옥 신철균 대표는 “저도 서울에서 평냉 처음 먹었을 때 아무 맛이 나지 않아 다 남겼다. 가게 초창기에는 면 다시 삶아달라고도 하고, 식초와 겨자를 때려넣어도 안 되니 맛이 왜 이러냐고 욕하는 사람이 많아서 힘들었다”라고 말했다. 담미옥에는 일본 손님도 많이 온다. 일본인들은 메밀면을 좋아하지만, 한국인처럼 육수를 들이켜지는 않는다. 평냉 맛을 아는 데는 아무래도 시간이 걸리고 경험이 필요한 것 같다.
백일평냉의 평양냉면.
부산 수영구 ‘백일평냉’은 2023년 9월부터 12월까지 100일만 팝업 식당으로 운영하고 문을 닫아 주목받았다. 알고 보니 8년 전에도 냉면집을 열었지만, 눈치 보고 타협하느라 자신의 냉면 맛을 지키지 못했던 게 못내 후회스러웠던 모양이었다. 팝업 식당 성공이 가져온 자신감으로 백일평냉은 2024년 3월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뛰어날 백(伯)’과 ‘편안할 일(逸)’을 합쳐, 뛰어난 냉면을 편안하게 즐겨달라는 의미였다. 백일평냉은 2025년부터 미쉐린 빕구르망에 선정되고 ‘성시경의 먹을 텐데’에도 소개되며 부산 냉면계의 신흥 강자로 부상했다. 유수한 1세대 냉면집들의 특장점적인 방향성을 종합적으로 지향한다고 밝히고 있다. 백일평냉 곽동훈 대표는 “여전히 많은 손님들이 식초가 보이면 냅다 둘러버리는 걸 너무나 잘 알기에 테이블에는 식초를 비치해 두지 않는다. 일반 식초는 도저히 맛이 없다. 대신 준비해 둔 특제 맛식초가 궁금하면 언제든 요청해 달라”라고 말한다. 의정부 계열의 평냉이 생각난다는 평가다. 다양한 전통주와 함께 오후 5시 반부터 ‘콜키지 무료’라고 붙여놓은 것도 눈에 띈다.
기장첫냉면의 평양냉면.
부산 수영구 ‘기장첫냉면’은 지난해 4월에 문을 연 후발 주자다. 하지만 냉면의 뿌리를 부산 기장에 연고가 있는 조선 시대 최고의 미식가 중 한 사람인 심노승에 두고 있다. 심노승은 순조 때인 1801~1806년 기장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겪은 일을 <효전산고>에 상세하게 서술했다. 여기에 그가 기장에서 먹었던 냉면에 대한 기록도 들어 있다. 돼지국밥으로 유명한 ‘청화백’ 김은석 대표가 냉면집을 열며, 부산과 관련 있는 냉면의 일화를 스토리텔링으로 엮은 것이다. 면발도 적당하고 개업 초기에 다소 심심하던 육수도 자리를 잡았다는 평가다. 기장첫냉면은 청화백 돼지국밥과 구분은 되어 있지만 매장을 같이 쓰고 있어 냉면이 부각되지 않는 부분이 아쉽다. 기장첫냉면 김은석 대표는 “밀면 장사도 했지만, 서울에서 평냉을 맛보고 나서 평냉 마니아가 되었다. 요즘 사람들은 건강을 많이 생각하기에 자극적인 양념이 많이 들어가는 음식보다 점차 평냉을 선호하는 쪽으로 변할 것으로 예상한다”라고 말했다.
부다면옥의 순메밀냉면.
부산 해운대 중동 ‘부다면옥’의 변신은 부산에서 냉면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부다면옥은 원래 반여동에서 ‘부다밀면’으로 영업하다, 2021년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상호를 바꾸고 평냉에 집중하고 있다. 2024년부터 연속으로 미쉐린 빕구르망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부다면옥 입구에 ‘Only Naengmyeon No Milmyeon’이란 안내문이 붙은 걸 보면 여전히 밀면을 찾는 손님이 적지 않아 보인다. 100% 순메밀면을 내세우는데 탱글탱글한 식감이 이채로웠다. 소박한 냉면 담음새는 살짝 아쉬움이 남는다.
이번에 방문해 기사에 소개한 5곳의 평냉 맛이 모두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다. 더 이상 평냉 먹으러 서울에 갈 필요가 없을 것 같고, ‘냉면 지옥 밀면 천국’이란 말도 이제는 맞지 않았다. 밀면으로 유명한 부산에 냉면이라는 선택지가 새로 생기며 미식도시로서의 면모를 더 갖추게 되었다. 올여름에는 밀면과는 또 다른 부산의 냉면에도 관심을 기울여 보면 좋을 것 같다. 내 입맛에 맞는 냉면집이 어디인지 더 찾아볼 생각이다. 글·사진=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