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유명한 동화작가로 꼽히는 안데르센은 어린 시절 빈민과 부유층 사이 극명한 차이에 충격 받아 예술을 통해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부산일보DB
노동으로 시로 옮긴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 그의 시에는 식민의 역사, 노동자와 가난한 이들의 삶을 담고 있다. 부산일보DB
가난한 사람들이 먹던 풀에서 이름을 딴 포르투갈 사라마구 작가. 1988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지만 2010년 죽기 직전까지 자기 중심의 보수주의자가 되는 것을 경계했다. 부산일보DB
찰스 디킨스 ‘위대한 유산’ 친필 원고. 12살부터 구두약 공장에서 10시간씩 일했던 그는 학교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부산일보DB
책을 읽고 글을 쓸 줄 안다는 것 자체가 권력이자 계급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독서와 작문은 특정 계층만의 것이었고, 교육과 문해력은 하층민에게 딴 세상의 이야기였다. 이렇게 문자를 소수만 독점할 때 문자 권력이라는 지배가 생겼다.
실제로 역사에서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은 오랫동안 권력의 상징이었다. 권력가들의 입장에서 기록하고 해석하고 법을 만들었고, 누군가는 기록되지 못한 채 지배당했다. 총칼만 작동한 것이 아니라 문자를 독점하고 지식을 독점하고 해석을 독점하며 특권을 누렸다.
오늘날에는 문해력의 확산으로 그런 권력이 많이 허물어진 듯 뵌다. 그러나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전히 문해력 격차는 존재하고, 교육의 불균형은 여전하며, ‘문장력’이라는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한다. 글은 여전히 ‘먹고 살 만한 사람’과 많이 배운 사람이 쓰는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다.
<표준어 바깥에서>는 그 같은 생각과 경계를 허문 작가, ‘문자 권력 밖의 작가’를 소개한다. 사회적 약자이자 주변인이었지만 글쓰기를 통해 살아남았고, 기록했고, 문학사를 바꾼 이들이다. 이들은 문자 권력을 바깥에서 글쓰기를 ‘배운’ 게 아니라 ‘살아내야 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이 어떻게 쓰기 시작했는지, 쉽지 않은 배경 속에서도 글을 멈추지 않았는지, 그 글이 어떻게 한 시대의 정신을 흔들었는지 조명하고 있다.
책은 17명의 작가를 담고 있다. 먼저 고대 그리스·로마의 노예 출신 작가 이솝과 테렌테우스, 여성으로서 최초로 시를 쓴 사람으로 알려진 시인 사포가 있다. 당시 노예와 여성은 인간 이하로 살았고, 남성만이 인간으로 대우받았다. 사실 그 같은 분위기는 중세는 물론 18세기까지 이어졌다. 책에선 거의 유일한 예외로 <돈키호테>의 작가인 스페인 세르반테스도 언급한다.
19세기 와서 노동자 출신인 영국의 디킨스, 덴마크의 안데르센, 미국의 마크 트웨인이 나온다. 20세기 전반 중국의 라오서와 한국의 강경애 작가도 있으며 20세기 후반 남미의 네루다와 포르투갈의 사라마구, 스웨덴의 에켈뢰브, 미국의 볼드윈과 안젤루, 프랑스의 모디랫, 독일의 발라프, 스코틀랜드의 웰시까지 소개한다.
책에 등장하는 작가는 대체로 널리 알려져 있다. 노벨상 수상 작가도 여러 명이며 이솝, 안데르센,디킨스, 마크 트웨인은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세대를 아우른다. 하지만 그들의 빈곤한 출신이나 저항적, 진보적 작품 세계는 그다지 강조되지 않았다.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이다.
이솝은 누구나 아는 우화 작가지만 아동용 작가로 오해받는다. 반체제적인 작품도 많지만 한국에는 유독 알려지지 않았다. 노벨문학상을 받으며 한국에 알려진 사라마구는 문맹의 소작농 부모 밑에서 태어나 10대 초반부터 학업을 접고 정비공으로 일했고, 예순을 앞두고 작가로 이름을 얻었다. 언급된 작가 중 여러 명이 10대 초중반부터 노동을 시작하며 제도권 교육조차 충분히 받지 못했다.
이 책은 가난하게 태어나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도 힘든 환경에서 감동의 언어를 길어 올렸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표준어의 바깥에서 세계를 다시 썼고, 교양의 장식이 아닌 삶의 기록을 남겼다. 어디서 출발했는지가 아니라 글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봐달라는 말이다.
이들에게 글쓰기는 출세의 사다리가 아니었다. 침묵을 깨는 일이었고, 보이지 않던 삶을 드러내는 일이었고, 주류가 정상이라고 우는 세계의 균열을 폭로하는 일이었다. 동시에 글이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문자 권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늘도 어떤 사람은 자기 언어가 없다고 느끼고, 어떤 사람은 자기 글이 하찮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작가의 실제 삶과 글을 통해 글은 원래부터 누구의 전유물도 아니라는 걸 증명한다. 가장 낮은 자리, 가장 멀리 밀려난 자리, 가장 오래 침묵을 강요받은 자리에서야 비로소 꼭 써야 할 말이 태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책을 통해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 ‘나도 작가나 시인이 될 수 있다’라는 결심이 서기를 기대한다. 박홍규 지음/틈새의시간/294쪽/1만 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