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이 '유영의 시간'(2023) 어컴퍼니 제공
전은숙 'Pipetting'(2026). 어컴퍼니 제공
어컴퍼니 전시장에서 만난 전은숙(왼쪽), 이진이 작가. 김은영 기자 key66@
동시대 회화는 여전히 캔버스 위에 머무르지만, 그 표면을 대하는 태도는 더 이상 단일하지 않다. 어컴퍼니(부산 해운대구 좌동순환로 433번길 38-15, 2층)가 오는 8월 2일까지 선보이는 2026 기획 시리즈 ‘수집된 관습, 해방된 재료’ 1부 ‘결의 온도: 숨긴 붓질, 드러낸 흔적’은 가장 익숙한 형식인 ‘오일 온 캔버스’(Oil on canvas, 캔버스 천 위에 유화 물감으로 그린 그림)를 다시 질문하며 회화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긴장을 호출한다.
이번 전시는 국내 미술 시장에서 안정적인 수집 대상으로 소비돼 온 캔버스를 ‘안전한 표면’이 아닌, 작가가 돌파해야 할 하나의 장으로 재설정한다. 참여 작가 이진이와 전은숙은 같은 매체를 두고도 정반대의 방식으로 회화의 조건을 밀어붙인다. 이진이는 붓질을 지우며 감정을 덜어내고, 전은숙은 물질을 증폭시키며 회화의 신체성을 드러낸다. 이 상반된 태도는 하나의 평면 위에서 극명한 ‘온도 차’를 형성한다.
어컴퍼니 전시장에서 만난 이진이 작가. 김은영 기자 key66@
이진이 'Blue Variations'(2026). 어컴퍼니 제공
이진이 'Blue Variations'(2026). 어컴퍼니 제공
부산을 기반으로 활동해 온 이진이는 약 3년 만에 본격적인 작업으로 돌아온다. 오랜 공백 이후 선보이는 신작 ‘푸른색 연구’(Blue Variations)는 이전보다 더욱 정제된 화면을 통해 작가의 매체 제어력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마치 기계적으로 도포된 듯 질감이 제거된 표면은 감정의 흔적을 허용하지 않으며, 대상과의 거리를 의도적으로 벌려 놓는다.
그러나 이 차가운 평면은 역설적으로 심리적 긴장을 증폭시킨다. 소파의 모서리, 구석진 공간, 그리고 부유하는 풍선과 같은 요소들은 현실에서 포착된 장면이면서도 작가에 의해 치밀하게 연출된 구성이다. 이진이는 일상의 사소한 장면 속에서 무의식이 스며 나오는 순간을 포착하고자 한다. 그는 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보다, 관람자가 ‘염탐’하듯 감지하도록 화면을 설계한다. 사소한 몸짓, 반복되는 습관, 무심한 시선 속에 잠재된 불안과 욕망이 그의 회화를 통해 은밀하게 호출된다.
이진이 'Blue Variations'(2026). 어컴퍼니 제공
특히 최근 작업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풍선은 이러한 감각을 집약하는 장치다. 고정되지 않은 채 부유하는 존재,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도는 상태를 상징하는 풍선은 안락한 소파 위에서도 불안을 환기한다. 작가가 말하듯, 그것은 편안함의 이미지가 아니라 오히려 “어디론가 이탈할 것 같은 순간”을 붙잡은 장면에 가깝다. ‘유영의 시간’이라는 작품 제목처럼, 이 이미지들은 삶의 방향성과 존재의 불확실성을 은유하며, 정지된 화면 안에서 미묘한 운동감을 생성한다.
어컴퍼니 전시장에서 만난 전은숙 작가. 김은영 기자 key66@
전은숙 'Pipetting'(2026). 어컴퍼니 제공
전은숙 '그늘에 초록'(green tomb, 2023). 어컴퍼니 제공
제주 출신으로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전은숙은 이진이의 절제된 평면과 반대로 캔버스를 물질의 장으로 밀어붙인다. 그의 화면에서 안료는 단순한 색채가 아니라 물질 그 자체로 작동한다. 작가는 안료를 겹겹이 쌓고 밀어내는 과정을 반복하며, 회화 고유의 촉각적 생동감과 날것의 흔적을 가감 없이 노출한다. 이때 드러나는 거친 마티에르와 즉각적인 선의 움직임은 회화를 시각적 이미지가 아닌 촉각적 경험으로 확장한다.
전은숙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결과라기보다 과정의 흔적이다. 안료와 캔버스 천이 마찰하며 생성하는 저항, 그리고 그 위에 축적되는 행위의 층위는 작가의 신체적 개입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는 젯소 칠과 사포질 등 캔버스 밑 작업을 철저하게 지키는 편이다. 이는 이진이가 제거한 붓질의 자리에, 다시금 ‘행위’와 ‘물질’을 되돌려놓는 방식이기도 하다. 두 작가의 작업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회화의 현재를 보여주며, 하나의 평면 안에서 극명한 온도 차를 만들어낸다.
이번 전시는 기획 시리즈의 출발점으로, 9월에는 박자현과 박상용이 참여하는 2부 ‘기록의 밀도’가 이어지고, 마지막 3부에서는 도미니크 드 비어가 지지체를 물리적으로 천공하는 작업으로 미술 시장의 보존 관습을 해체할 예정이다. 전시 관람은 수~토요일 낮 12시~오후 6시 30분(8월 2일 일요일은 정상 운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