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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속 조선인 강제 동원 흔적들 잊지 말아야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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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 위에 우리가 있었다/이재갑 그 길 위에 우리가 있었다/이재갑

1942년 시작된 히로시마 고보댐 공사에는 경상도 출신의 조선인 노동자가 2000명이나 강제 동원됐다. 공사 중에 조선인 노동자들이 구조물 밑바닥 시멘트 더미 위로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떨어진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소리쳤고, 밧줄을 내려보내려는 순간이었다. 일본인 감독이 작업을 중단하지 말라고 고함을 친 뒤, 직접 시멘트를 삽으로 떠서 아래로 부었다. 조선인 노동자들이 떨어지는 시멘트를 팔로 막아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생매장, 말 그대로였다. 그 뒤 고보댐은 ‘인골(人骨)댐’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믿기 어렵지만 당시 신문 기사에 실린 내용이니 믿지 않을 수도 없다. 실제로는 이보다 더한 일도 많았다고 한다.

다큐멘터리 사진가 이재갑은 1996년부터 30년 가까이 후쿠오카에서 나가사키·오사카·히로시마·오키나와까지 조선인이 끌려간 자리를 봄·여름·가을·겨울로 나눠 되짚어 걸었다. 탄광과 해저 갱도, 군사 벙커, 원폭 도시와 이름 없는 묘지…. <그 길 위에 우리가 있었다>는 저자가 그 자리에 서서 풀과 돌과 나무가 건네는 소리를 듣고, 그것을 생생한 사진 총 160컷과 글로 옮긴 기록이다.

너무나도 믿기 힘든 이야기들이 속속 등장한다. 나가사키항에서 서남쪽으로 14.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다카시마라는 섬이 있다. 1884년 이 섬에서 콜레라가 발생해 광부 3000명 중 1500명이 사망했다. 그런데 이들을 화장하는 과정에서 살아 있는 사람까지 태워버린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규모로 광부들의 폭동이 일어났다. 진압 과정은 잔인했고 더 많은 광부가 사망했다. 또 오키나와에서 당시 병원으로 쓰인 이토가즈 동굴에는 3000명의 일본군 부상자가 있었다. 그들은 일본군에게 몰살당했다. 전력 약화와 기밀 유출이 우려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당시 일본인들은 대체 어떤 광기에 집단적으로 사로잡혀 있었을까.

‘강을 따라가면 바다가 나올 것이고, 그 바다가 조선으로 데려다줄 것이다.’ 강제 동원되어 힘든 노동으로 심신이 지치고 힘들어졌을 때 이렇게 생각했던 조선인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많은 이들이 강을 향해 도망치다 붙잡혀와서 맞고 고문당했다. 해방이 되자 일본 정부는 조선인이 조선으로 돌아갈 때는 한 사람당 1000엔만 가져갈 수 있게 하는 경제적 금수 조치를 취했다.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다.

개중에는 양심적인 일본인도 있었다. 후쿠오카현 지쿠호 지역의 기록 작가 하야시 에이다이 씨 같은 분이다. 그의 아버지는 조선인 광부를 돌봐줬다는 이유로 고문 끝에 사망했다. 그는 평생을 국가 폭력에 희생되고 억압받는 이들의 진실을 밝히고 위로하는 일에 매진했다. 50여 년간 <조선인 강제 연행>, <군함도의 피 묻은 기록> 등 50권이 넘는 저서를 남겼다.

일본은 군함도 유네스코 등재를 위해 조선인 강제노역 역사를 알리겠다고 약속했으나 지키지 않았다. 사도 광산 때도 조선인 노동자 동원에 대한 강제성 명시가 미흡한 상태로 등재됐다. 저자는 “자유와 평화는 노력하는 자의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미래도 그럴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지난해 일본을 가장 많이 방문한 외국인은 한국인이었다. 일본 여행도 좋지만 일본 각지에 흩어져 있는 조선인 강제 동원과 관련된 흔적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재갑 지음/책숲/316쪽/2만 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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