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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신춘문예-평론] 실존의 침묵에 맞서는 재현의 윤리 / 김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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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스틸컷. 찬란 제공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스틸컷. 찬란 제공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스틸컷. 찬란 제공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스틸컷. 찬란 제공

파시즘의 귀환과 재현의 (불)가능성

최근 스웨덴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소(V-Dem)’에서 발행한 〈민주주의 보고서 2025〉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자유 민주주의’에서 한 단계 하락한 ‘선거 민주주의’로 분류했다.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에서 발행한 〈민주주의 지수 2024〉 역시 한국을 ‘결함 있는 민주주의 국가’로 선정한 바 있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공통적 현상처럼 보인다. V-Dem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72% 국가가 독재 정부 치하에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이는 1978년 이래 최고 수치에 해당한다. 이탈리아 철학자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는 전 세계가 파시즘으로 치닫고 있다고 진단한 바 있다. 야만적 폭력과 인간성 말살 현상이 빠르게 증대할 것이며, 문명의 종국적인 붕괴까지 초래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일련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파시즘과 인종 학살을 다룬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3)가 거둔 성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무엇을 성취했는가를 이야기하기 앞서, 영국 비평가 마크 피셔의 논의를 알아보자. 마크 피셔는 자크 라캉에 기대어 ‘실재’와 ‘현실’을 구분한다. 실재란 현실이 반드시 억압해야 하는 재현 불가능한 X, 균열과 비일관성 속에서만 엿볼 수 있는 트라우마적 공백을 의미한다. 우리는 존재하지만 재현할 수 없는 실재와 ‘직접’ 마주할 수 없다. 다만 어떤 균열과 얼룩, 오점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실재란 현실과 대립하며 기만적인 현실의 층위를 벗겨내는 무엇이라고 지적한다. 현실은 실재를 억압함으로써 구조화되기에, 실재의 환기가 현실의 구조를 깨부수기 때문이다.

전쟁의 실재는 추상적인 기호 체계, 이를테면 사망자 숫자, 경제적 피해액, 간접적인 목격담, 혹은 단편적인 정보와 이미지 몇 장만으로 재현 불가능한 무엇이다. 전쟁의 실재는 전쟁이 실행되고 진행되는 순간, 그것을 몸으로 체감해야만 했던 주체에게 닥치는 공포와 폭력의 실체, 형언할 수 없는 끔찍함과 참혹함으로 가득한 현장의 한가운데 있다. 따라서 실재를 재현하려는 영화적 시도는 한계점에 봉착하기 마련이다. 재현의 대상이 ‘쇼아’처럼 트라우마적 사건이라면 더욱 그렇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공포와 절망―시체 타는 냄새, 희생자의 공허한 눈빛들, 가축처럼 끌려가 도살당하는 인간 등―의 실재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언어화할 수 없는 대상, 카메라 렌즈와 축음기로 담아낼 수 없는 사태 앞에서 예술가는 침묵을 지킬 뿐이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쇼아를 ‘암흑의 구멍’이라 지칭하며 이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를 구분한다. 첫 번째는 구멍을 금기의 영역에 내버려두는 것이다. 이는 쇼아를 접근 불가능하고 상상할 수 없으며 형상화할 방법이 없는 ‘환영의 공간’으로 취급하는 방식이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시는 불가능해졌으며, 아우슈비츠 이후의 모든 문화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선언한 바 있다. 이는 재현 불가능한 실재로서 쇼아를 손댈 수 없는 어둠 그 자체이자, 마치 종교적인 ‘성스러움’의 대상과 유사하게 취급하는 태도다. 두 번째는 실재에 대한 재현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구멍 안에 빛을 비추기 위해 시도하는 것이다. 이는 구멍을 응시하고, 구멍 안으로 들어가고, 어둠으로부터 무언가를 끄집어내려는 시도를 부단히 감행하려는 태도다. 이와 관련하여 알랭 바디우는 아도르노가 언급한 시의 불가능성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바디우는 파울 첼란의 시를 예시로 들며, 그가 아우슈비츠에 관한 시적 창조를 결코 멈추지 않음으로써, 실재를 사유하고 명명하는 ‘시적 성취’를 달성했다고 평가한다. 글레이저 감독은 파울 첼란의 작업처럼 두 번째 방법을 선택한다. 감산하고 비워내기를 통해 재현 불가능한 대상의 재현을 감행한다.

그렇다면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재현하려는 대상은 무엇인가? 누구의(혹은 무엇의) 무엇인가? 바디우는 ‘존재’와 ‘실존’을 엄밀하게 구분한다. 존재한다고 해서 모두가 동일한 강도로 실존하는 건 아니다. 바디우는 플라타너스 나무 한 그루를 예시로 든다. 길거리에 줄지어 서 있는 플라타너스 나무들은 각각을 구성하는 원소가 다르기에 존재적으로 구별되는 개체다. 그러나 차를 타고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사람에게는 차이가 인식되지 않기에, 두 그루의 나무는 유사성으로 출현한다. 반면 두 나무 사이에 가만히 누워있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에게 두 그루의 나무는 본질적으로 다른 고유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두 경우 모두 나무의 존재는 동일하지만, 세계에서 드러나는 실존의 양상은 다르다. 빠르게 지나치는 운전자에게 플라타너스 나무는 거의 인식조차 되지 않으며 실존값은 미약하다. 반면 나무 아래 누워 나뭇가지의 흔들림을 관찰하는 몽상가에게 플라타너스 나무의 실존값은 크고 강렬하다.

이러한 구도는 인간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하나의 세계 내에서 누군가의 실존은 크고 강렬한 강도를 갖지만, 반대로 누군가의 실존은 미미하다. 세계는 어떤 이들에게 관심이 없으며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 취급한다. 이를테면 난민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의심할 나위 없이 확실하지만, 이들의 실존은 지극히 미약하다. 이들은 세계 내에서 아무런 힘을 소유하지 못하며 원하는 바를 거의 쟁취할 수 없다. 오늘날 현실 세계에서, 특히 정치의 영역에서 난민은 ‘비실존자’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비실존자란 세계 내에서 최소로만 측정되는 어떤 것일 뿐, 결코 ‘무(無)’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독일 장교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 분)가 지닌 실존의 정도는 강렬하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인 루돌프 회스는 수용소 안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수용소 바로 옆에 호화로운 저택을 지어 가족과 함께 거주 중이다. 집에는 많은 방과 욕실, 커다란 수영장이 자리 잡고 있으며, 다양한 꽃과 식물을 키울 수 있는 넓고 아름다운 정원도 갖추어져 있다. 자질구레한 집안일을 담당하고 관리할 하인 역시 즐비하다. 이렇듯 루돌프와 그의 가족은 안락한 저택에서 친구와 가족을 초대하여 파티를 벌이며 풍요롭고 충만한 생활을 영위한다. 반면 루돌프의 집 너머의 세계, 화면 바깥의 세계와 그곳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실존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의 존재는 명백하지만, 세계 내에서 어떠한 위치도 점유하지 못하는 비생명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비실존자다.


광학적 방식에 관하여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재현 전략은 모호하고 간접적인 방식을 사용하여 비실존자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영화는 수용소 담장을 기준으로 서로 다른 장소에 거주하는 자들의 실존값의 차이를 내화면과 외화면의 분리로 구분한다. 먼저 루돌프 가족을 비출 때 카메라는 수평 앵글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주체의 시선과 밀착하여 담아냄으로써 그들이 세계에 출현하는 실존의 강도를 부각한다. 영화의 디제시스 안에서 루돌프의 집은 어두운 무대 한가운데 강렬한 핀 조명이 떨어진 공간과 유사하다. 조명 안과 밖의 대비가 강렬할수록 주변은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게 된다. 조명이 내리쬐는 루돌프의 집이 바다 가운데 섬처럼 떠오르고 그 바깥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침묵한다. 카메라는 담장 너머의 비실존자를 응시하지 않는다. 가해자가 지닌 시선의 권력을 재현하듯 그들을 비가시적 대상으로 외화(外化)하고 밀어냄으로써 극소의 실존값을 재현한다.

실제로 카메라는 집안일을 돕는 하인으로 등장하는 짧은 장면을 제외하고는 유대인을 거의 비추지 않는다. 특히 수용소 내부의 유대인은 한 번도 카메라의 시선에 온전히 포착되지 않는다. 하지만 라캉이 말했듯 상징계가 억압한 실재는 상징화되지 않는 오점으로서, 현실의 한계를 가리키고 그 너머의 이면을 드러내는 구멍으로서 영속한다. 스크린은 그러한 오점을, 다시 말해 현실이 일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배제한 것의 흔적을 포함하고 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비실존자가 화면 내부로 틈입하는 순간은 그들이 신체를 지니고 살아있는 인간 존재로부터 추방당하여 인간 아닌 무엇(이를테면 무기물에 해당하는 비생명)이 되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요컨대 비실존자의 존재는 실재적 오점―오물이나 잔여물로 상징화됨으로써만 카메라 시선의 내부로 포착된다.

루돌프 가족의 시선에서 유대인은 인간이 아닌 불결한 폐기물로 제시된다. 생일 선물로 나룻배를 선물 받은 루돌프가 아이들과 함께 강가로 놀러 간 씬을 보자. 루돌프는 낚시하고 있고 아이들은 물가에서 장난치며 놀고 있다. 이때 강 상류로부터 희뿌연 무언가가 떠밀려 내려온다. 회색빛 물결의 정체는 수용소에서 학살당한 유대인들의 시체를 소각하고 남은 잿물이다. 그때 루돌프는 물속에서 인간의 얼굴 뼈 일부를 건져낸다. 놀란 루돌프는 집으로 돌아와 자신과 아이들의 몸을 철저히 소독하고 닦는다. 아이들이 코를 풀자 소각장의 연기 그을음이 흘러나온다. 또 다른 씬은 루돌프의 부인 헤트비히 회스(산드라 휠러 분)가 남편을 찾아 강가로 걸어가는 장면이다. 카메라는 그녀의 눈높이에 맞춘 수평 앵글로 움직인다. 배경에 보이는 수용소 지붕 너머로 시체 소각장의 연기가 끊임없이 올라온다. 이처럼 루돌프 가족 일상의 중간 무심하게 틈입하는 실재의 잔여는 비실존자가 화면 너머에 존재하고 있음을 부단히 상기시킨다. 리얼리즘적 재현을 포기한 카메라의 시선은 참상을 직접 보여주며 고발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바깥에 누군가 분명히 존재했다고(혹은 존재한다고) 말이다.

루돌프 가족에게 장벽 너머의 세계에 거주하는 존재들은 인지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카메라는 이들의 시선을 따라 수용소 내부를 보여주지 않는 편을 선택한다. 하지만 불가피하게 그 세계를 보여주어야 할 순간이 있다. 물론 수용소는 철저히 분리되고 격리된 세계이며, 출입 역시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금지된 세계로의 외출을 시도하는 소녀가 있다. 루돌프의 집에서 일하는 폴란드 소녀는 수용소 안을 돌아다니며 누군가 먹을 수 있도록 음식을 숨겨둔다. 이때 카메라는 적외선 촬영을 활용한 광학적 방식으로 조심스럽게 금기에 접근한다. 오직 파충류 중 일부 종만이 적외선을 통해 사물을 인식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루돌프 가족이 살아가는 세계, 풍요롭고 살만한 ‘인간적인 세계’를 비출 때 카메라는 인간의 시선을 활용한다. 하지만 이와 대비되는 ‘비실존자의 세계’는 수많은 생명이 스러져가는 비(非)공간이다. 카메라는 인간적 시선의 리얼리즘을 포기하고 비인간의 시선으로 바라봄으로써 재현 불가능한 것의 재현을 시도한다. 쇼아의 공간은 검은 장막으로 온통 둘러쳐진 듯한 칠흑 같은 어둠의 세계로 그려진다. 모든 게 말살되고 빛을 잃은 지옥 안에서 오직 소녀의 작은 몸짓과 따뜻한 선의를 품은 음식만이 미약한 빛을 발산할 뿐이다.

음식을 숨긴 소녀는 루돌프의 집으로 돌아온다. 이때 카메라는 동일한 장면을 다른 각도에서 두 번 보여준다. 먼저 외부에서 소녀를 바라보는 씬이 나오고 뒤이어 집 안에서 소녀를 맞이하는 씬이 붙는다. 집의 내부가 인간의 세계임을 보여주듯 집 안의 카메라는 일상적인 장면과 동일한 방식으로 소녀를 비춘다. 반면 집 바깥의 카메라는 수용소 내부와 동일한 열화상 카메라를 사용하여 소녀를 바라본다. 인간적 시선과 비인간적 시선으로 구분되는 카메라의 시선은 분절된 두 세계 간의 대비를 감추거나 이음새를 메우려는 어떠한 노력도 시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자연스럽고 급작스러운 장면 전환을 통해 간극을 넓히고 기묘한 이질감을 강조한다.


음향적 방식에 관하여

광학적 방식에 더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음향 기법을 활용하여 평온해 보이는 현상 너머의 실재를 드러낸다. 이는 오점을 드러내는 카메라의 시선과 유사하게 의미화되지 않고 상징화되지 않는 소리, 그러나 화면 너머에서 지속적으로 들려오는 소음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앞서 언급한 씬으로 돌아가 보자. 소녀가 위험한 외출을 시도하는 동안, 카메라는 비인간의 시선으로 소녀의 행적을 좇는다. 동시에 그림 형제의 동화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와 함께 낮고 누군가 경고하는 듯한 소리의 신경질적인 저음이 반복해서 삽입된다. 어린아이를 위한 동화 내용과 대비되는 위협적인 사운드의 극명한 대비는 압도적인 현실의 폭력 앞에 노출된 소녀의 상황과 몸짓의 의미를 선연하게 강조한다.

사운드가 일으키는 심상의 불일치는 그 외에도 여러 장면에서 반복된다. 수용소 내 루돌프의 일상을 보여주는 씬에서 카메라는 무언가를 응시하는 루돌프의 얼굴을 로우 앵글로 클로즈업한다. 루돌프는 성가시다는 듯 다소 인상을 찌푸리며 무언가를 내려다보기도 하지만 표정이나 자세에 거의 변화가 없다. 카메라는 무려 30초에 달하는 긴 시간 동안 동일한 각도에서 루돌프의 무료한 일과를 담아낸다. 보이는 건 루돌프의 옆모습과 어깨에 걸친 희뿌연 하늘, 그리고 원인 모를 검은 연기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연기의 정체가 시체 소각장이 뿜어내는 그을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끝없이 피어오르는 연기를 배경으로, 고함과 비명, 누군가의 처절한 절규와 흐느낌이 들리고, 뒤이어 총성이 울려 퍼진다. 카메라는 지옥일 것임이 분명한 수용소 장내의 풍광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배경에서 들려오는 소음을 통해 비실존자의 존재를 암시한다. 우리는 내화면 바깥의 참극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헤트비히가 정원을 소개하는 쇼트는 영화가 추구하는 재현 방식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헤트비히는 집을 찾아온 어머니 리나 한셀(이모젠 코제 분)에게 공들여 가꾼 정원을 소개한다. 헤트비히는 꽃과 허브, 채소 등을 자랑한 뒤, 자신을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라 지칭한다. 이후 카메라는 정원의 꽃을 비춘다. 꽃이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잡히고 배경에서 들려오던 소음이 커지기 시작한다. 꽃 주위를 맴돌던 벌의 날갯짓 소리가 증폭되다가 이윽고 먼 소음으로 확장된다. 윙윙대던 소리가 비명과 총성으로 변하더니 붉은 꽃이 화면을 가득 채워 핏빛으로 물든다. 헤트비히가 자랑하는 정원이 타인의 피와 생명을 대가로 피어났음이 암시된다. 경고하는 듯한 과도하고 불쾌한 저음과 신경질적인 사운드가 잇달아 들려온다. 이처럼 화면과 불협하는 사운드의 삽입은 우리에게 목가적 상황처럼 보이는 내화면의 기만으로부터 깨어날 것을, 바깥의 실재를 기억할 것을 부단히 상기시킨다

극 중간에 삽입되는 사운드가 이질감과 낯섦의 충격 효과를 산출한다면, 오프닝과 엔딩에 배치된 사운드는 존재론적 질문을 제기한다. 일반적인 음악은 한 옥타브를 12개로 분절한 평균율(equal temperament)을 기반으로 창작되었다. 하지만 자연에는 사실 무한한 수의 ‘음(音)’이 존재한다. 감각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12음이 제시하는 음과 음 사이에 존재하는 다채로운 음의 존재를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다. 우리는 무한의 음 중에 임의로 구분한 12개의 음으로 한 옥타브를 구성하여 음악에 활용할 뿐이다. 이때 선택받은 극소수의 12개 음은 선율과 화성을 이루며 수많은 음악 안에서 강렬하게 실존하지만, 배제된 무한한 나머지 음은 음악의 영역에서 비실존하는 침묵의 음이 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이전까지 음악에서 무관심했던 음에 주목하며 실재에 접근한다. 그것은 12음계보다 세분화된, 음과 음 사이의 간극에 존재하는 미분음(微分音, Microtone)을 사용하여 음계 바깥에 위치한 음들을 되살려내는 방식이다. 미분음은 청자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낯설고 기묘한 감각과 함께 불안감과 긴장감을 자아낸다. 작곡가 미카 레비(Mica Levi)는 음악의 형식적 실험을 통해 미분음처럼 분명히 존재하지만 침묵 당해 온 비실존의 존재를 표출한다. 미카 레비는 글레이저 감독의 다른 영화 ‘언더 더 스킨’(2013)에서도 미분음을 사용한 바 있다. 이때 미분음은 영화 곳곳에 삽입되어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외계 존재를 향한 기괴하고 으스스한 감각을 형성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미분음은 극 중간이 아닌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오프닝과 엔딩 크레딧에 삽입된다. 오프닝 장면은 미분음을 활용하여 불협하는 사운드를 들려주면서, 비실존자의 존재를 들려주려는 영화의 목적을 암시한다. 극 중간의 사운드는 비실존자의 고통과 비명을 화면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음의 형태로 삽입한다. 엔딩 크레딧은 오프닝에서 제시된 미분음에 더해 영화의 상영시간 전체를 통해 하나씩 축적된 비실존자의 절규를 한 데 응축하여 폭발시킨다. 마지막 순간 미분음들 사이에 희생자의 소리를 배치하고 쌓아 올려, 거대한 절규의 교향곡을 상연한다. 영화의 디제시스 내에서 시종일관 인식 너머로 추방당해 제대로 보이거나 들리지 않던 비실존자들은 그제야 비로소 저마다 고유한 주파수를 가진 미분음이 되어 강렬하게 실존함으로서 공기를 뒤흔든다. 비실존자들이 온몸으로 발산하는 공기의 파동은 켜켜이 쌓여 존재를 부정하는 세계를 향해 고함친다. 가해자에 의해 피해자의 실존은 침묵당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는 지워지지 않고 남아 비명을 지른다. 실존을 은폐 당한 존재가 내지르는 탄식과 곡(哭)을 들으며 우리는 문득 소름 끼치는 섬뜩함을 느낀다. 그들은 말한다. 내가 분명히 여기에 존재했다고(혹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스틸컷. 찬란 제공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스틸컷. 찬란 제공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스틸컷. 찬란 제공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스틸컷. 찬란 제공

악의 평범성 혹은 정치성

루돌프는 낮에는 수용소 내부에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면 다정하고 따뜻한 가장이자 동물애호가가 된다. 루돌프의 가족은 장벽 너머에서 수많은 인간이 죽고 소각당하는 와중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평온한 일상을 보낸다. 그들은 마치 수용소가 없다는 듯, 장벽 너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듯 생활한다. 그렇다고 이들이 인지 능력에 문제가 있거나, 어리석은 바보들인 것은 아니다. 이들은 누구보다 약삭빠르고 속물적이며, 기민하게 자신의 손익을 정치적으로 판단하여 행동한다. 이는 언뜻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에 대한 예증처럼 보인다. 아렌트에 따르면 나치 전범들은 끔찍한 괴물이나 악마가 아니라 평범한 이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다만 상부의 명령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지 못한 채 맹목적으로 순응한 끔찍한 인간들이었을 뿐이다.

바디우에 따르면 아렌트주의자들이 주장하듯 나치의 부역자들이 사유하지 못한 채 맹목적으로 행동한 바보들이라 여기는 순간, 우리는 사태의 핵심을 놓치게 된다. 아렌트주의자들은 주로 악의 행위를 저지른 개인에게 초점을 맞춘다. 비판적 사고력이 결여된 개인이 문제라는 식이다. 하지만 바디우는 나치 전범들은 분명히 자신이 저지르는 행동을 인식하고 사유하고 있었으며, 더 나아가 나치즘 자체가 정치이자 사유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나치 독일은 끔찍하고 파렴치한 조치들을 정성스럽게 계획하고 사유하였으며, 가장 엄격한 방식으로 다루었다. 나치가 저지른 악은 무사유로 인한 게 아니라, 정치 그 자체의 온전한 실패로부터 비롯되었다.

희생자들을 비가시화하고 침묵시킨 건 개인의 무사유가 아니라 정치의 작동으로부터 비롯된다. 영화는 악의 평범성을 넘어 악의 정치성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는 독일군이 헝가리를 점령하게 된 이후의 회의에서 잘 드러난다. 나치 독일의 수뇌부는 헝가리에 거주하는 70만 명의 유대인 학살을 위한 계획을 논의하고 있다. 매일 유대인이 1만 2천 명씩 열차를 통해 수송되고, 노역에 동원되는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은 수용소로 보내 학살당하는 계획이 수립된다. 이때 카메라는 수직의 부감숏으로 테이블을 내려다본다. 외곽부가 왜곡되어 있고 중앙에 집중되는 형태의 카메라 시선은 학살을 결의하고 실행에 옮긴 세기의 범죄가 이루어진 정치적 장소를 고발하는 듯하다.

동일한 시선이 조금 뒤 반복된다. 70만 명의 학살을 결정한 뒤, 나치 수뇌부와 그들의 가족들이 참여하는 파티가 벌어진다. 흥겨운 음악과 분위기에 맞춰 멋을 낸 사람들이 파티를 즐기고 있다. 이때 카메라는 수직에서 중앙을 부각하는 시선으로 이들을 내려다본다. 카메라는 인간의 시점에서 파티의 흥취에 동참하는 대신 멀리서 거리를 둔 채 비인격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는 인간의 얼굴을 한 파티장 내부의 범죄자들로부터 거리를 둔 채, 이들이 추악한 범죄자 집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동시에 이 장면은 높은 곳에서 파티장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루돌프의 시선과도 유사하다. 루돌프는 이전부터 대량의 유대인들을 효율적으로 말살하고 소각하는 방법을 개발하기 위해 애써 왔다. 24시간 쉼 없이 작동하는 소각장을 만들기 위해 구획을 나누어 가열과 소각, 냉각을 반복할 수 있는 순환 소각장 도입을 계획한다. 파티장에서도 루돌프는 파티에 동참하는 대신 높은 곳에 올라 사람들을 내려다본다. 건물 전체의 구조와 규모를 살피며, 어떻게 하면 이들을 효과적으로 학살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루돌프는 자신의 성취를 즐기거나 타인과 감정적으로 교류하지 못한다. 그는 세상의 속물성으로부터 거리를 둔 채, 열정적으로 자신의 일에만 골몰해 있다. 이처럼 루돌프는 자신이 맡은 일을 기계적으로 반복한다든가 생각 없이 명령을 따르는 게 아니다. 그는 마치 종교적 헌신에 가까운 태도로 정교하게 임무에 관해 사유하고 고도화하여 악을 실현한다. 문제의 관건은 루돌프의 태도와 행동에서 무사유와 아둔함의 증거를 찾기는 힘들다는 점이다. 그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악이 된 것이 아니라, 추구하는 목표 자체가 악이었기에 생각이나 과정과 무관하게 악의 구현자가 된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고 나면 문제의 원인이 정치의 실패 때문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떠오른다.

아내 헤트비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사치스러운 생활에 흠뻑 빠진 헤트비히는 남편의 인사이동을 따라가는 대신 아이들과 함께 아우슈비츠에서 그대로 지내겠다고 말한다. 헤트비히는 자신뿐 아니라 아이들 역시 이곳에 적응하여 행복하고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지옥 옆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 온전할 리 없다. 아이들은 가스실을 흉내 내며 서로를 가두고 처형하는 놀이를 즐긴다. 헤트비히는 ‘아우슈비츠의 여왕’으로 계속 살고 싶은 자신의 속물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진실을 애써 모르는 척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헤트비히와 그녀의 어머니 리나와의 대화 씬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외부에서 온 리나는 수용소의 담장을 똑바로 응시하며, 헤트비히에게 담장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수용소가 없다는 듯 살아가던 헤트비히는 그제야 담장을 언급하며, 포도 덩굴을 잔뜩 심어 가리려 한다고 말한다. 리나가 이야기를 이어가려 들자 재빨리 말을 끊고 화제를 돌린다. 헤트비히는 수용소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알고 있다. 다만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기에 시야에서 차단하고 인식 바깥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그녀에게 정원 가꾸기란 밤낮없이 수용소로부터 들려오는 비명과 절규, 소각장으로부터 날아오는 시체의 연기와 그을음을 무시하고 비가시화하려는,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현실을 봉합하고 상징화하려는 가증스러운 몸부림이다. 리나는 실재의 틈입을 버티지 못해 딸의 집을 떠나고 만다. 반면 헤트비히의 속물적 욕구는 살풍경한 장벽과 소음, 죽음의 재조차 불사하고 무시할 만큼 집요하다. 루돌프 역시 희생자들의 절규와 고통이 보거나 듣지 못하는 게 아니다. 루돌프는 바로 앞 희생자들의 절규는 들리지 않는 듯 아무런 주의와 관심도 기울이지 않지만, 멀리서 들려오는 작은 새 소리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며 호기심을 보인다.

그렇다면 나치나 그와 유사한 파시즘이 초래하는 위기에 관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가? 다시 바디우로 돌아가 보자. 바디우는 정치적 사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바디우에게 사건이란 특정한 존재 혹은 집단의 실존값을 극소로 떨어뜨려 무화(無化)하려는 세계에 저항하는 사태를 의미한다. 사건은 현실 속에서 거의 실존하지 않는 듯 여겨지는 비실존자의 실존값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그들의 실존을 강렬하게 현시하는 어떤 사태다. 이러한 사건은 주체 내부로 수용됨으로써 세계 내에 자리를 잡고 정치화되며 계속 이어진다. 사건의 주체는 비실존자가 세계 안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며, 세계의 구도와 배치 전체를 변화시켜 그들에게 온당한 몫과 자리를 할당하는 구체적이고 정치적 행위로 나아간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와 관련하여 우리는 발생한 참상을 부정하거나 외면하려는 세계에 대항하여, 수용소 안에는 수많은 사람이 존재했으며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인간적 고통과 죽음이 있었음을 증언하고 부단히 상기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비극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까지 나아가는 주체적 충실성을 견지해야 한다. 요컨대 반복되는 파시즘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적 참상을 어둠에 방치한 채 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재현의 (불)가능성, 반복되는 재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끊임없이 재현을 시도하고 감행할 때 비로소 비극은 반복되지 않는 과거의 일로 머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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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으로서의 영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신적 시선이 다시 한번 등장한다. 루돌프 회스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유대인 70만 명에 대한 이송과 학살 계획이 자신의 이름을 딴 ‘회스 작전’으로 결정되었다며 승전보를 고지하듯 자랑한다. 자다 깬 아내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듯 무료한 태도로 대꾸할 뿐이다. 루돌프는 사무실에서 나와 계단을 따라 아래층으로 이동하던 중 문득 구역질하더니 비틀거린다. 이때 루돌프가 바라보는 시선의 복도 끝 소실점에 작은 빛이 보인다. 카메라의 시선은 소실점을 향해 수평으로 이동하더니 시간을 건너뛰어 현재의 수용소를 비춘다. 이전의 카메라가 수직으로 올라가 인간의 자리로부터 거리를 둔 채 초월적 관찰자의 위치에서 역사적 참극의 순간을 고발하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면, 이번에 카메라는 수평으로 이동하여 미래의 시간을 경유한다. 박물관이 된 아우슈비츠 수용소. 희생된 자들이 신었던 신발, 수용복, 그 외 다양한 소지품, 사진, 그리고 남은 건 끔찍하리만큼 고요한 적막과 암전.

카메라라는 대타자의 시선은 인간의 눈높이에서 참담한 비극 이후를 담담히 돌아본 뒤, 다시 루돌프에게로 돌아온다. 미래의 시간이 작은 소실점을 통과하며 역류한다. 희생자들의 고통이 주체를 향해 넘실대는 파도처럼 쇄도한다. 카메라는 질문을 던지는 듯한 시선으로 주체를 응시한다. 케 보이(Che Vuoi)? 루돌프의 신체가 일으킨 구역질은 그에게 남은 일말의 인간성이자 희생자와 동일한 한 명의 생명체로서의 신체가 보이는 생리적 거부 반응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루돌프는 이윽고 정모(正帽)를 눌러쓰고는 깊고 어두운 지하로, 끔찍하리만큼 긴 절멸의 침묵을 향해 내려간다. 파시즘 정치, 루돌프의 정치적 자아는 그의 인간적 자아를 억누르고 돌이킬 수 없는 승리를 거두었다. 루돌프가 주도한 회스 작전으로 헝가리 거주 유대인 70만 명 중 40만 명이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석 달에 걸쳐 모두 살해당했다.

전 세계의 정치적 위기가 고조되는 오늘날,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가해자의 시선과 행적을 따라가며 지난 세기 파시즘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재현을 감행한다. 재현 불가능한 것의 재현을 위해 영화는 총체적 재현을 포기하고, 이질적인 것의 출몰을 통해 간접적인 방식으로 설핏 드러낸다. 보이지 않는 바깥의 어둠을 고통스럽게 응시하고, 들리지 않는 비실존자의 낮은 신음에 귀를 기울인다. 이는 희생자를 침묵시키고 무로 만들려는 시도에 맞서, 그들의 실존을 강경하게 상연하는 영화적 리얼리티와 재현의 윤리를 보여준다. 극소의 미광으로, 백색 소음으로 바스러지던 비실존자는 치밀하게 계산된 광학 장치와 음향 기법을 통해 강렬한 실존값을 갖는 하나의 ‘사건’으로 거듭난다. 영화가 박물관에 전시된 쇼아의 증거물을 보여주며 숨 막힐 듯 잔인한 침묵을 이어갈 때, 우리는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고요함 속에 여전히 은폐된 미분음이 존재하고 있음을, 비가시화된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을 소리높여 반복해 증언하지 않는다면 누군가의 실존은 또다시 침묵 당하고 말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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