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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 피란민·140만 동포 품은 부산… ‘수용’이 재도약 해법 [부산은 열려 있다]

김희돈 기자 happy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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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부산 영주동 길가의 공동수도에서 물을 길어 나르는 주민들 모습. 현재의 코모도호텔 앞 대로변으로 추정된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부산일보DB 1952년 부산 영주동 길가의 공동수도에서 물을 길어 나르는 주민들 모습. 현재의 코모도호텔 앞 대로변으로 추정된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부산일보DB
피란수도 시절 대통령 관저.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부산일보DB 피란수도 시절 대통령 관저.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부산일보DB
부산 중구 유라리광장에 조성된 ‘피란수도광장’의 조형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부산일보DB 부산 중구 유라리광장에 조성된 ‘피란수도광장’의 조형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부산일보DB

해양수산부가 옮겨 온 부산은 ‘해양수도’로 불린다. 우리나라 해양과 관련한 모든 걸 아우르는 도시. 그런데, 사실 부산은 해양뿐만 아니라 한 나라의 국정을 모두 떠안은 국가 수도의 역할을 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1953년 종전 때까지의 피란수도 부산. 전쟁을 피해 전국 팔도에서 몰려든 피란민들과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여야 했던 시기였지만, 부산에 상흔만 남긴 건 아니다. ‘피란수도 부산 1023일’은 부산이 그들을 품고, 그들과 어울려 일상을 영위하며 자연스럽게 ‘공존과 개방의 DNA’를 체득한 귀중한 시간이었다.


■이방인 껴안은 공생의 역사

한반도 남동쪽 끝단의 부산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자유 진영의 마지막 보루가 됐다. 그해 6월 전쟁 시작 사흘 만에 서울이 북한군에 점령될 만큼 남한은 대비가 전혀 없었다. 서울과 경기도, 강원도는 물론이고 충청도 주민까지 물밀듯 부산으로 몰려왔다. 곧이어 전라도와 경북 등 도미노처럼 북에 점령된 지역에서 지주나 반동분자로 몰린 이들이 야반도주하듯 피란 대열에 합류했다.

1949년 47만 명이던 부산 인구는 전쟁 2년째인 1951년 84만 명에 이른다. 이런 흐름은 휴전협정이 맺어진 1953년까지 이어진다. 한 기록은 1·4 후퇴 직후인 1951년 3월 부산 인구가 120만 명에 달했다고 전하기도 한다. 전란기 기록이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전쟁 전의 곱절이나 되는 100만 명 안팎의 사람들이 부산에서 부대끼며 살았다는 얘기다. 부산으로선 낯선 외지인을 품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전쟁통의 피란민 생활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고단한 몸을 누일 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야산으로, 하천으로, 심지어 소 막사와 공동묘지로도 향했다. 1951년 가을은 혹독한 겨울을 예고하듯 연일 기온이 떨어졌다. 판잣집조차 구하기 쉽지 않던 그때, 부산의 개방 DNA가 유감없이 발휘됐다. 시가 나서 ‘전재민(전쟁 이재민)을 위한 방 비워 주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인 것이다.

콩 한 쪽 나누듯, 집안의 방 한 칸이라도 양보하자는 이 캠페인은 이방인을 기꺼이 껴안은 부산의 개방성과 포용성이 잘 드러난 사례로 꼽힌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은 “부산 토착민들도 먹고살기 힘든 상황에서 한두 명 선행을 베풀 수는 있지만, 시 차원의 캠페인을 벌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부산의 몸에 밴 공동체 정신이 발휘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부산의 개방 DNA, 다시 발휘할 때

이런 부산의 포용성과 개방성은 사실 한국전쟁 이전부터 형성된 것으로 봐야 한다. 1945년 해방 이후 일본 본토를 비롯해 동남아 각지로 이주했거나 강제로 끌려갔던 동포들이 부산항을 통해 귀환했다. 1946년까지 이어진 귀환 행렬은 14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귀환 동포 중 약 20만 명이 부산에 정착했다. 당시 28만 명이 거주하던 부산은 기존 인구와 맞먹는 식구를 새로 맞아들인 셈이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부산항을 기종점으로 진행된 조선통신사 교류와 일본인 거류지로 조성된 왜관도 빼놓을 수 없다. 부산학 연구자들은 이런 역사가 부산이 동족 간의 공존지대를 넘어 오늘날 다문화사회로 불리는 이민족과의 공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문화적 토양이 됐다고 입을 모은다.

올해 7월 부산에서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개최되는 것도 부산의 포용과 개방 DNA와 무관하지 않다. 지난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47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부산은 전쟁과 피란의 한가운데에서 문화와 인류애를 지켜온 피란수도 역사를 강조해 회원국의 지지를 받았다.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피란유산)’은 국가유산청이 지난해 11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우선등재목록으로 선정했다. 잠정목록으로 선정된 지 2년 만이다.

전문가들은 부산이 품고 있는 이런 포용의 역사와 개방 DNA가 인구 감소와 경제적 쇠락을 극복하는 해법이 될 수 있다고 진단한다. 부산문화재단 오재환 대표이사는 “강과 바다로 열린 부산은 역사적으로 거부보다 환대, 배척보다 수용의 기질을 발휘한 혼종의 도시”라며 “이런 부산의 기질은 경제 성장기 수출의 현장으로서, 또 글로벌 문화 교류와 유행의 최일선으로서 현재까지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오 대표이사는 이어 “부산이 위기라고 하는데, 이럴 때 우리 특기인 개방 정신이 다시 발휘된다면 글로벌 도시로 재도약하는 데 큰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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