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선사 하이제해운의 컨테이너선 이스탄불브리지호가 지난해 9월 말 북극항로를 힘차게 지나고 있다. 중국 닝보에서 영국 펠릭스토우항까지 20일 만에 주파했다. 동영상 캡처
긴 안목에선 북극항로가 우리에게 중요한 물류 루트라는 점에 이견이 없다. 하지만 해운업계에서는 내빙선박을 지어야 해 초기 투자비가 더 많이 들고, 보험료, 쇄빙선 이용료 등의 운항 비용도 더 많이 들 것이라고 걱정한다. 남방항로에 비해 기항지가 부족해 물동량을 확보하기 어렵고, 수익성도 낮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컨테이너 항로 가능성 입증
이에 대해 지난해 9월 말 중국 닝보항을 출발해 영국 펠릭스토우항까지 단 20일 만에 운항한 중국 하이제해운의 이스탄불브리지호는 다른 의견을 내놓는다. 한국해운협회 김세현 부산지사장은 “컨테이너선인 이스탄불브리지호의 성공적인 북극항로 통과는 북극항로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완전히 불식시켰다”고 평가했다. 그가 이런 평가를 한 이유는 컨테이너에 실린 화물이 기존 북극항로 물동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천연자원이 아니라 유럽으로 수출하는 고부가가치 상품들이었다는 점이다.
리튬이온 배터리, 태양광 패널과 ESS(에너지 저장장치), 전자상거래 물품과 패스트 패션 제품 등 2800억 원 상당의 물품이 운송됐다. 희망봉 우회 남방항로 운항 기간의 절반 수준에 불과한 운송 기간으로, 제조업자의 재고 부담을 크게 덜어줬고, 신속한 공급이 중요한 첨단 부품 수송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항로라는 점이다. 하이제해운 측은 재고 부담을 최대 40% 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배터리나 정밀 부품 같은 열에 민감한 첨단제품은 북극이 남방항로에 비해 품질 유지에 더 유리한 것으로 평가됐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은 북극 빙하가 녹는 여름(7~11월)에 이스탄불브리지호와 비슷한 5000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급 컨테이너선 기준 운항비가 북극항로는 300만 달러로, 수에즈운하(380만 달러), 희망봉 경유(417만 달러)보다 저렴하다는 분석을 내놨다.
■북극 자원으로 공급망 확대
북극항로를 물류 루트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더 설득력 있다. 기항지와 물동량이 창출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국내 기업들이 북극항로 주요 지점에 거점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 이성우 선임연구위원은 “우리 기업이 러시아 자원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자원 생산부터 판매까지 권한을 확보하면 국내 자원 공급망 다원화와 가격 안정 측면에서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미지질조사국(USGS) 2008년 조사에 따르면 세계에서 아직 채굴되지 않은 석유의 13%, 천연가스의 30%가 북극에 묻혀 있다. 일본 에너지금속광물자원기구(JOGMEC) 하라다 다이스케 본부장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서구의 3차례에 걸친 러시아 제재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북극 야말 가스전, 아틱 LNG2, 사할린 가스전 등에 투자자로 여전히 참여하고 있다. G7의 일원이자 미국의 맹방이지만 안정적 에너지 확보라는 국익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러시아 가스나 석유 개발에 지분 투자가 전혀 없었다.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전쟁이 발발하자 서방의 러시아 제재에 동참했지만 살상 무기 수출은 자제하며 러시아와 최악의 관계까지는 가지 않았다. 하지만 2024년 4월 북한과의 군수물자 운송, 정보기술(IT) 인력 송출 등에 의혹을 제기하며 독자적으로 러시아 국적 선박과 기관, 개인을 제재했고, 러시아는 대응조치로 한국을 비우호국 명단에 올렸다.
■에너지→식량→컨 단계적 접근
러시아의 자원이 지하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유전자 변형을 허용하지 않는 청정 곡물과 명태, 대게 등 수산물도 풍부하다. 목재 필렛 등 임산물, 철광석 등 광물도 넘쳐난다.
KMI 이 위원은 에너지 수송을 1단계로, 곡물·수산물·광물·임산물 수송을 2단계로, 컨테이너 상업 운항을 3단계로 하는 북극항로 단계적 활용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실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해 3월(국제북극포럼)과 9월(동방경제포럼) ‘북극항로’ 정책을 ‘북극횡단 복합운송회랑’ 정책으로 확대한다고 밝혔다.
2025년부터 1조 7905억 루블(한화 약 39조 원)을 투입하는 메가 프로젝트다. 북극항로와 내륙 수운, 철도, 항공 등을 묶어 내륙 화물이 북극항로로, 북극항로 화물이 내륙으로 오갈 수 있는 길을 만든다는 목표다. 이 위원이 제안한 북극항로 활성화 2단계 사업과 정확히 일치하는 정책이다. 이 위원은 러시아가 목말라 하는 물류 거점과 항만 건설 사업에 한국 기업들이 협력 사업자로 참여하면서 현지 물동량도 창출하고, 물류 거점도 확보하는 전략을 구사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다.
결국 불확실성 리스크와 낮은 경제성을 극복할 방법은 단계적 접근법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실무적으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전과 서방의 대러 제재 해제가 이뤄지는 즉시 러시아와의 외교 관계를 회복하고 양국 정부 차원의 상호 투자에 대한 안전 보장 협정을 맺을 필요가 있다. 이를 바탕으로 대러 투자를 단계적으로 확대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러시아가 북한과 전략적 동맹 관계를 맺고 있어 미러 관계 회복이 북미 종전 평화협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기대 섞인 전망도 내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