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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 5년 차인 30대 직장인 김 모 씨는 최근 퇴직연금 방식을 확정급여(DB)형에서 확정기여(DC)형으로 전환했다. 지난해부터 국내외 증시가 강한 상승세를 이어가면서 연봉 인상률을 웃도는 수익을 낼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김 씨는 회사에 요청해 기존에 쌓여 있던 퇴직연금 적립금을 전부 DC 계좌로 옮겼다. 이후 해당 자금을 미국 S&P500과 나스닥 지수를 추종하는 상장지수펀드(ETF), 타깃데이트펀드(TDF) 등에 분산투자했다. 그는 “퇴직연금도 결국은 내 돈인데, 회사에 맡겨두는 것보다는 직접 운용하는 게 낫다고 봤다”고 말했다.
■퇴직연금 ‘무브’
최근 들어 김 씨 사례처럼 DB형에서 DC형으로 갈아타는 직장인이 빠르게 늘고 있다. 몇 년간 이어진 글로벌 증시 상승세가 결정적 계기다. 시장에서는 이를 두고 이른바 ‘퇴직연금 무브’라고 부르고 있다. 특히 30~40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연금자산을 적극적으로 운용하려는 흐름이 확산되고 있다. 과거에는 퇴직연금을 ‘보장형 급여’로 인식했다면, 최근에는 ‘장기투자 자산’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뚜렷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 같은 변화는 통계로도 확인된다.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의 ‘투자와 연금 리포트’에 따르면 DB형 비중은 2012년 73.9%에서 지난해 49.7%로 급락했다. 퇴직연금 도입 이후 처음으로 과반이 무너진 것이다. 반면 같은 기간 DC형은 17.6%에서 27.1%로, 개인형 퇴직연금(IRP)은 8.5%에서 23.2%로 빠르게 확대됐다. 단순한 상품 선택 변화가 아니라, 연금 운용 방식 자체가 ‘회사 중심’에서 ‘개인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신호다.
DB형은 퇴직 시 받을 금액이 사전에 확정되는 구조다. 평균임금과 근속연수에 따라 급여가 산정되며, 운용 책임은 회사가 진다. 시장이 급락해도 약정된 급여가 보장된다는 점에서 안정성이 가장 큰 장점이다. 특히 임금 상승률이 높은 시기에는 자연스럽게 퇴직급여도 늘어나는 구조다. 다만 운용 성과가 좋아도 추가 수익을 기대하기 어렵고, 저금리 환경에서는 자산 증가 속도가 제한된다는 단점이 있다. 물가 상승을 고려하면 실질 수익률이 마이너스로 떨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반면 DC형은 회사가 매년 일정 금액을 적립하면 이를 개인이 직접 운용하는 방식이다. 투자 성과에 따라 자산이 크게 늘어날 수 있지만, 손실이 발생하면 그대로 반영된다. 운용 책임이 전적으로 개인에게 넘어오는 구조다. 쉽게 말해 ‘연금의 주식화’가 이뤄지는 셈이다.
■연금도 자산…‘수익률’ 우선
직장인들이 DC형으로 이동하는 가장 큰 이유는 수익률에 있다. 특히 글로벌 주식형 ETF를 중심으로 장기 투자에 나서는 경향이 빠르게 늘고 있다. 미국 증시가 장기간 상승 흐름을 이어오면서 ‘DB형으로는 수익을 따라갈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이다. 실제 연금 계좌에서 S&P500이나 나스닥 지수를 추종하는 ETF 비중은 최근 몇 년 사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일부 투자자는 연금 자산의 대부분을 해외 주식형 자산에 배분하는 공격적인 전략을 택하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투자 환경 변화도 영향을 미쳤다. 모바일 트레이딩 시스템(MTS)을 통해 연금 계좌에서도 손쉽게 매매가 가능해지면서 접근성이 크게 높아졌다. 과거처럼 금융회사에 운용을 맡기는 구조가 아니라, 개인이 직접 자산 배분과 리밸런싱을 수행하는 것이 일상화된 것이다. 여기에 금융사들이 다양한 TDF와 ETF 상품을 공급하면서 선택지도 크게 늘어났다. 은행과 보험사 등에서 운용하는 방식보다 실시간 체결이 가능한 증권사를 선호하는 경향도 높아지고 있다.
DC형의 강점은 명확하다. 투자 자산을 직접 선택할 수 있어 시장 상황에 맞춰 포트폴리오를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다. 주식·채권·리츠·원자재 등 다양한 자산에 분산 투자해 장기 복리 효과를 노릴 수 있고, 운용 성과가 계좌에 그대로 반영된다. 연금저축이나 IRP와 연계해 전체 노후 자산을 하나의 포트폴리오로 관리하기도 수월하다. 특히 장기적으로 글로벌 자산에 투자할 경우 국내 경제 상황과 무관하게 수익 기회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힌다.
다만 리스크 역시 분명하다. 가장 큰 변수는 시장 변동성이다. 상승장에서는 높은 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지만, 하락장에서는 손실이 그대로 반영된다. 특히 퇴직 시점이 가까울수록 회복 기간이 부족해 손실이 고착화될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은퇴를 2~3년 앞둔 시점에 시장이 급락할 경우, DB형과 달리 손실을 방어할 장치가 사실상 없다. 연봉 인상률이 높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전환할 경우 손해가 클 수 있다는 뜻이다.
개인의 투자 역량에 따라 성과가 크게 갈린다는 점도 부담이다. 일부는 장기 분산투자를 통해 안정적인 수익을 쌓아가지만, 상당수는 단기 매매나 특정 종목·섹터에 집중 투자했다가 오히려 수익률을 깎아먹는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연금계좌에서도 일반 주식 계좌처럼 매매를 반복하다가 손실을 보는 사례가 적지 않다”며 “연금은 투자 기간이 길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한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연금은 ‘장기전’
전문가들은 전환 여부를 결정할 때 몇 가지 기준을 반드시 따져봐야 한다고 조언한다. 우선 퇴직까지 남은 기간이다. 일반적으로 10년 이상 장기 투자 여력이 있다면 DC형의 복리 효과를 기대할 수 있지만, 단기간 내 퇴직을 앞둔 경우라면 안정성이 높은 DB형이 유리하다. 또 시장 변동에 따른 손실을 감당할 수 있는지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상승장 뒤에는 반드시 조정장이 따른다는 점을 전제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운용 계획 역시 핵심 변수다. 단순히 ‘수익률이 높을 것 같다’는 이유로 전환하는 것은 위험하다. 자산배분 전략과 리밸런싱 기준 없이 투자에 나설 경우 오히려 DB형보다 낮은 성과를 기록할 가능성도 있다. 주식과 채권 비중, 글로벌 자산 편입 여부, 하락장 대응 전략 등을 사전에 설정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특히 DB에서 DC로의 전환은 한번 선택하면 되돌릴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최근처럼 시장이 좋을 때 전환에 나섰다가 향후 조정기에 손실을 입을 경우, 되돌릴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선택의 기준은 분명하다. 리스크를 감내해서라도 더 높은 수익률을 추종할 것인지 아니면 안정성을 지킬 것인지다. DC형은 분명 매력적인 선택지지만 그만큼 책임도 큰 것이 현실이다. 장기운용과 분산 투자 원칙을 지키지 못한다면 DC형은 DB형보다 못한 선택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