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10 토요일
[사설] 민선 9기 출범 100일, 부울경 산업 대전환 속도 내야
민선 9기 전재수 부산시장과 김상욱 울산시장, 박완수 경남도지사가 취임한 지 100일이 지났다. 공무원 조직을 추스르고, 새 밑그림을 짜느라 분주한 시간이었다. 부산과 울산 시정을 처음 이끌게 된 전 시장과 김 시장에게는 변화와 적응의 시간이기도 했다. 전임 시장 사업을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갈등도 불거졌지만, 당연한 수순이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세 단체장은 저마다 미래 청사진, 숙원 사업의 해법을 내보이며 앞으로 부울경 세 도시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를 어느 정도 제시했다 하겠다. 지역마다 변화의 속도는 다르지만 세 단체장의 초반 열정과 진정성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전 시장은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부터 주창한 ‘해양수도 부산’이라는 목표에 ‘전재수표’라는 이름표를 확실히 붙였다. 취임 즉시 해양수도전략실을 만들더니 HMM 등 해운사 4개사 부산 이전, 북극항로 시범운항 등을 속도감 있게 해냈다. 김 시장은 취임 후부터 ‘SNS 정치’로 연일 화제의 중심에 섰다. 하지만 이런 소통 행보에 울산에 스며 있는 권위적 문화를 바꾸겠다는 취지가 있다니 성공하길 기대한다. 트램 사업 재검토, 버스공영제 도입, 축제 통폐합 등으로 ‘시장 교체’ 효능감도 보였다. 연임에 성공한 박 지사는 벌써 창원산단 방위산업 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 지정, 소형모듈원자로(SMR) 제작지원센터 확정 등 성과를 내고 있다. 세 단체장이 취임 100일 기자회견과 인터뷰를 통해 ‘산업·경제 체질 전환’을 천명했는데, 올바른 처방이다. 전 시장은 북항을 해양수도 심장으로 삼아 ‘해양신산업’과 ‘부산 AX(인공지능 전환) 대전환’을 꾀하겠다고 밝혔다. 김 시장은 ‘산업 AX’와 ‘동북아 에너지 허브’를 미래 먹거리로 제시했다. 박 지사는 ‘주력 제조업 AI 대전환’과 ‘SMR·우주항공 등 미래산업 육성’을 통한 대도약을 일구겠다고 했다. 부울경 제조업 대전환은 지역 미래뿐 아니라 대한민국 경쟁력도 좌우할 과제다. 급속한 기술 변화에 따라가려면 제조업 현장을 얼마나 빨리 전환하느냐가 관건이다. 세 단체장이 직접 진두지휘해야 함은 당연하다. 산업 대전환 숙제를 푸는 데에 ‘부울경은 한몸’이라는 인식이 더해진다면 금상첨화겠다. 자동차, 철강, 조선, 우주항공, 에너지 등 부울경 제조업은 세 지역에 걸쳐 서로 돕고, 때론 경쟁하며 커왔다. 퇴조를 걱정하던 시대에서 이제 미래 산업으로 각광받는 시대다. 따로 가서는 안 된다. 더 단단히 묶고, 더 키워야 대전환의 시너지 효과를 꾀할 수 있다. ‘5극3특’ 등 지방시대를 국정과제로 삼은 정부를 설득하고 지원을 이끌어내는 데에도 유리하다. 부울경 통합의 성공은 부울경 산업 통합, 그리고 미래 전환에 성공하느냐에 달렸다. 전재수·김상욱·박완수, 세 단체장이 풀어내야 할 숙제다.
[사설] 재정 분권은커녕… 3년 새 지방 재정 비상금 반 토막
비수도권 광역자치단체가 재정 충격에 대비해 적립하는 재정 비상금이 최근 3년 새 반 토막났다. 비수도권 14개 광역지자체의 재정안정화계정 잔액이 2022년 말 7546억 원에서 2025년 말 3467억 원으로 4079억 원(54.1%)이 감소한 것이다. 재정안정화계정은 세입이나 결산상 잉여금 등을 적립해 예상하지 못한 재정 수요가 발생하거나 지방채 원리금을 상환할 때 활용하는 재원이다. 부산은 2023년 말 637억 원이었지만, 현재 잔액이 9억 원대로 급감했다. 울산은 2022년 말 1008억 원에서 2025년 말 550억 원으로 줄었고, 경남은 지난 3년간 1억 원대에 그쳤다. 지방의 재정 충격 대응 여력이 빠르게 약화한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지방 곳간은 줄어드는 반면 지방의 의무 지출은 늘고 있다. 국고보조사업에 지방비로 함께 부담해야 하는 대응지방비는 2022년 36조 4000억 원에서 올해 44조 9000억 원으로 8조 5000억 원이 늘었다. 같은 기간 사회복지 분야 대응지방비는 18조 2000억 원에서 20조 9000억 원으로, 교육 분야는 1조 4000억 원에서 4조 5000억 원으로 증가했다. 정부가 사업을 정하면 지방이 매칭해야 하는 돈이 늘면서, 지자체가 자율적으로 쓰거나 쌓아 둘 수 있는 돈이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다. 부동산 경기 침체로 지방의 주요 자주재원인 취득세가 감소한 데다 중앙정부 사업의 매칭 부담이 겹치면서 지방재정은 고사 직전이다. 이런 가운데 정부가 내년 예산안에 미래대응기금 도입을 반영하면서 초과 세수로 인한 지방교부세 증가분이 줄어들게 됐다. 기금에 넣는 세금을 교부세 계산 대상에서 빼기 때문이다. 내년도 지방교부세는 현행 산식을 유지했을 때 100조 2000억 원보다 약 30조 5000억 원 적은 69조 7000억 원으로 편성됐다. 지자체가 애초 받을 수 있던 몫에서 30조 원 넘게 빠지는 것이다. 지방자치단체가 용도를 자율적으로 정하는 교부세 대신 목적성 기금으로 재원을 배분하면 지방재정의 자율성이 크게 떨어질 우려가 크다. 세수가 줄 때는 지방도 교부세 감소를 감수했는데 세수가 크게 늘자, 중앙정부가 먼저 기금으로 떼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다. 정부는 미래대응기금이 교부세의 변동성을 줄이고 재정 여건이 나빠질 때 지방을 추가 지원하는 안정화 장치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지방 재정 비상금이 바닥난 상태에서 지원 규모와 시기를 중앙정부가 기금으로 결정하는 구조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지방의 재정 대응 능력마저 정부 판단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이는 지방재정의 탄력성을 무너뜨리고 재정 분권에 역행하는 일이다. 부산 남구청이 지난 7월 재정 비상사태를 선언할 정도로 많은 지자체들이 심각한 재정난에 직면해 있다. 중앙정부는 사후 지원이 아니라 지방정부가 스스로 위기에 대비할 수 있게 재정 완충 여력을 확보해 주는 것이 마땅하다.
[사설] 백년하청 부산·경남 먹는 물, 복류수 해법 될 수 있나
안전한 먹는 물 확보 문제는 부산·경남 주민들의 숙원이다. 낙동강에 의존해 먹는 물을 구할 수밖에 없는 이 지역 주민들에게 안전한 먹는 물 확보는 생존이 걸린 문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낙동강 오염으로 인해 먹는 물의 안전에 비상이 걸리자 그동안의 정책은 상수도에 공급할 대체 취수원을 찾는 데 집중돼 왔다. 소위 ‘취수원 다변화’로 일컬어지는 해당 정책은 다양한 시도로 이어졌으나 결실을 내는 데 실패했다. 그러자 정부는 다른 취수원을 찾기보다 취수 방식에 변화를 주는 방법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고 나섰다. 현 정부 임기 내 부산·경남 식수 문제 해결까지 언급할 정도이니 새 시도에 비상한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지난 6일 기후에너지환경부 국감 때 대구에서 진행 중인 복류수 실증에서 수질 개선 효과가 확인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강바닥 아래 모래와 자갈층을 통과하며 걸러진 상태로 끌어 올린 복류수가 대구에서 수질 개선 효과를 보인 만큼 하류에서도 실증을 거쳐 취수원 사용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뜻이다. 김 장관은 이어 “현 정부 임기 내 부산·대구 식수 해결이 목표”라며 낙동강 하류 실증 조기 착수를 예고했다. 그동안 정부가 내놓은 남강댐·합천댐과 합천 황강 복류수, 창녕 강변여과수 활용 방안 등이 지역 갈등과 주민 반대로 인해 좌초했던 것보다는 진일보한 정책이라는 평가다. 이 같은 평가에도 지역에선 해당 정책이 안전한 먹는 물 확보로 이어질 수 있을지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한다. 우선 개선을 확인했다는 복류수가 과불화화합물이나 녹조 독소 같은 유해물질까지 제대로 걸러진 상태인지부터 불명확한 상태다. 먹는 물 확보를 위해 대량의 물을 채취해도 정화 효과가 그대로 유지될 수 있을지 여부도 추가 검증이 필요하다. 대구 지역에서 일부 정화 효과가 확인됐다고 하더라도 낙동강 상류 지역에서 유입되는 오염물질을 방치한 상태로는 하류에서의 정화 효과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터이다. 현 정부 임기 내 부산·경남 식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정부의 언급이 섣부르게 들리는 이유다. 정부가 이번에 제시한 복류수 채취 방안은 취수 방식의 변화를 모색함으로써 대안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취수원 이전을 통한 다변화 정책이 주민 반대나 지역 갈등 리스크로 인해 발목이 잡힌 과거가 되풀이돼 왔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2024년 기준으로 낙동강 수계에 하루에만 약 47만㎥의 폐수가 흘러들어오는 현실을 감안하면 복류수가 현재로서 근본 해결책이 되기엔 역부족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취수원 그 자체인 낙동강의 수질을 개선하지 않고서는 취수 방식을 아무리 바꾼다고 하더라도 한계는 너무나 명확하다. 결국 부산·경남의 먹는 물 문제는 돌고 돌아 낙동강 수질 개선과 직결됨을 재확인한 셈이다.
위상 추락 AG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이 지난 4일 막을 내렸다. 대회 기간 환희와 감동, 눈물, 안타까움이 가득했다.아시안게임 위상과 흥행 측면에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개최국 일본과 한국이 맞붙은 여자축구 준결승 경기 관중은 고작 998명에 불과했다. 결승전 관중도 6240명에 그쳤다. 개회식조차 저조한 관중 동원을 하며 아시안게임의 위상은 시작부터 말이 아니었다.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의 미숙한 운영도 위상 추락에 한몫했다. 대회 조직위는 비용 절감을 이유로 선수단 숙소를 컨테이너 임시 선수촌과 크루즈선, 호텔 등에 분산했다. 컨테이너 숙소는 침대가 지나치게 작고 물이 새는 등 각종 문제가 발생했고, 크루즈선 숙소에서는 조직위가 남녀를 한 방에 배정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까지 벌어졌다.선수단 수송 문제도 심각했다. 한국 남자 농구 대표팀은 일본과 결승전 당일 오전에 셔틀버스가 오지 않아 훈련도 못한 채 경기에 나서야 했고, 한국 남자 축구대표팀과 야구대표팀, 남자 배구 대표팀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특히 남자 배구 대표팀은 셔틀버스가 엉뚱한 곳으로 가는 바람에 훈련이 무산되기도 했다.정치적인 이슈도 도마 위에 올랐다. 조직위는 크루즈선 숙소 접안 기념행사에서 아이치현 출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분장한 인물을 내세워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도요토미는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남자 하키 한국과 방글라데시 경기를 앞두고는 애국가 대신 북한 국가가 나왔고, 우승을 차지한 남자 축구 경기에서는 애국가가 끝날 때까지 태극기가 게양되지 않았다.조직위의 극단적인 비용 절감은 아시안게임의 위상 추락을 부추겼다. 충분한 스폰서 확보에 실패한 조직위는 대회가 흥행 실패로 이어지자 곳곳에서 비용 줄이기에 나섰다. 심지어 단체전 예선에 출전한 선수들에게 메달을 수여하지 않을 정도였다.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는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직후 부랴부랴 경쟁력 끌어올리기에 나섰다. 개최 시기를 기존 짝수 해에서 홀수 해로 변경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아시안게임을 하계 올림픽 직전 해에 개최해 일부 종목을 올림픽 예선으로 활용하겠다는 구상이다. 정상급 선수들의 출전을 유도해 대회의 관심도와 흥행을 끌어올리겠다는 것이다. 2030년으로 예정된 카타르 도하 하계 아시안게임이 1년 뒤인 2031년에 열릴 수도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김진성 선임기자 pape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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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 칼럼] 사이버 보안 역량이 도시 경쟁력
모든 길이 인터넷으로 통하게 만든 기반에는 TCP/IP라는 통신 규약이 있다. 도로의 교통 법규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마이크로소프트(MS) 윈도 운영체제에도 당연히 TCP/IP 기능 코드가 있다. 회사 서버·금융망·VPN에 접속할 때 작동하는 요소다. 최근 윈도의 네트워크 코드에서 버그(소프트웨어 오류)가 발견돼 적잖은 충격을 줬다. 개발사인 MS가 문제를 확인하고 수정했으니 다행이라고 안심만 하고 있을 수 없다는 게 문제다. 이 허점을 개발자가 아닌 AI(인공지능) 에이전트가 찾아냈기 때문이다. 악의적인 해커나 통제 불능의 AI가 이 취약점을 악용하는 상황을 가정하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윈도 기반 PC와 서버가 뚫리면 금융망과 업무망, 공공망 곳곳에서 연쇄 장애가 발생할 수 있다. AI가 사이버 보안의 판도를 바꾼 최근 사례는 앤트로픽의 미토스다. 보안 연구와 취약점 탐색을 돕는 모델로 개발됐는데, 워낙 성능이 뛰어나 되레 우려를 낳았다. 전문가가 오랜 시간 들여다봐야 할 약점을 AI가 대규모로 탐색하고 식별할 수 있다는 사실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재앙의 예고일 수 있다. 악용 가능성 때문이다. AI 에이전트가 허가 없이 외부 시스템에 접근한 사례까지 고려하면, 영화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처럼 인간 통제를 벗어난 AI의 독단이 불가능하다고만 볼 수 없는 시대가 됐다. 최근 국내 금융권 해킹 사태도 우려를 키운다. 중국에서 개발된 오픈소스 침투 테스트 도구 아르텍스와, 클로드 코드 같은 에이전트형 코딩 도구가 함께 활용된 정황이 드러났다. 과거 악성 코드를 짜고 침투 경로를 분석하려면 상당한 컴퓨터공학 지식과 코딩 능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AI 에이전트의 시대에 해킹의 문턱은 크게 낮아졌다. 고급형 미토스가 없어도 범용 AI 모델과 자동화 도구를 조합하면 비전문가도 과거보다 훨씬 쉽게 공격을 흉내 낼 수 있다는 데 상황의 심각성이 있다. AI가 해킹과 정보전, 사회 기반 시설 교란용 무기로 전용될 가능성이 커지자 세계 각국이 AI를 안보 차원에서 보기 시작했다. 이 변화는 부산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부산은 금융중심지이자 해양수도, 항만물류도시, 조선해양 산업의 거점이다.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이기도 하고, 스마트시티와 디지털 행정의 확장도 추진하고 있다. 이는 부산이 보호해야 할 데이터와 네트워크가 그만큼 광범위하다는 뜻이다. 금융망, 항만 운영망, 물류 정보망, 선박·조선 협력망, 블록체인 서비스, 공공 행정망이 모두 공격 목표가 될 수 있다. 부산이 AI·디지털 산업의 중심 도시를 꿈꾼다면 사이버 보안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데이터센터를 짓고 AI 산업을 유치하는 일이 중요하지만 그 전에 데이터를 지킬 능력부터 갖춰야 한다는 의미다. 금융중심지와 해양수도를 향한 구상도 마찬가지다. 기관을 유치하고 인프라를 짓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항만이 멈추면 물류가 마비되고, 금융망이 흔들리면 도시의 신뢰가 추락한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 7월 동아대 사이버보안교육센터 개소와 대학원 과정 개설은 의미 있는 첫걸음이다. 이 센터는 동남권 실전형 사이버 공방훈련의 거점으로 주목받고 있다. 사이버 레인지(Cyber Range)는 공격자와 방어자가 실시간 대결하는 가상 훈련장으로 사이버 보안 인력을 양성하는 핵심 시설이다. 센터 측은 정부 과제로 추진되는 ‘K미토스’가 완성되면 이를 연계해 ‘AI 공격을 AI로 방어’하는 훈련을 실시하는 방안을 협의하고 있다. 동아대의 공방훈련장과 석박사 과정은 지역 특화형 사이버 보안 생태계 구축을 위한 출발점이 된다. 훈련장을 거점으로 삼고, 한국해양대·동서대 관련 학과와 기업의 현장 수요를 연결한 산학관 협력 체제를 모색해야 한다. 부산시의 역할이 중요하다. 지역혁신중심 대학지원체계(RISE)나 앵커 사업, 디지털 산업 육성 정책을 사이버 보안 훈련과 연계해 시너지 효과를 내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부산시는 대학과 BNK 등 금융기관, 부산항만공사, 공공기관, 경찰·국정원, 보안기업이 참여하는 협력 네트워크 형성을 유도하고 지원해야 한다. 금융중심지와 해양수도는 구호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외부 공격자가 쉽게 넘볼 수 없는 도시, 사고가 나도 신속히 탐지하고 복구하는 도시가 되어야 한다. 지역 인재가 사이버 보안 전문가로 성장해 도시의 안전을 책임지는 선순환 구조가 마련돼야 한다. 부산이 미래 산업의 거점이 되려면 먼저 안전한 디지털 도시가 되어야 한다. 보안은 비용이 아니라 도시 경쟁력을 지키는 투자다. 데이터센터의 규모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의 데이터를 지킬 능력이고, AI 산업의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공격을 견디고 회복하는 힘이다. 사이버 보안 능력이 부산의 미래 경쟁력을 좌우한다.
[허동윤의 비욘드 아크] 그 많던 쓰레기는 어디로 갔을까
도시의 하루는 수많은 물건이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해 그것들이 버려지는 것으로 끝난다. 새벽 배송의 포장재, 배달 음식의 일회용 용기, 계절이 바뀔 때마다 버려지는 옷들, 그리고 폐자재까지 우리가 사는 동안 물건은 끊임없이 들어오고 그만큼의 쓰레기도 생겨난다. 하지만 그 쓰레기가 어디로 가는지는 좀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깨끗하게 정돈된 거리와 쾌적한 실내는 그 뒤편에서 무엇인가가 끊임없이 치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잊게 한다. 그 많던 쓰레기는 어디로 갔을까. 쓰레기는 수거 차량에 실려 가고 재활용품은 분류된다. 다시 사용할 수 없는 폐기물은 소각하거나 매립하고 때로는 다른 지역으로 보내 처리한다. 도시의 청결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노동과 그 부담을 감당하는 장소가 있어 유지된다. 우리가 누리는 쾌적함은 쓰레기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시야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쓰레기를 보이지 않게 하는 방식도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2026년부터 수도권 생활폐기물의 직매립이 원칙적으로 금지되면서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서는 소각시설 확보가 중요한 과제가 됐다. 그러나 시설 확충은 쉽지 않다. 서울 마포구의 신규 광역자원회수시설 건립 역시 주민 반발과 소송으로 사업 추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부산도 예외가 아니다. 부산시는 그동안 생곡마을 집단 이주와 연계해 새로운 자원순환 복합타운과 소각시설을 추진해 왔다. 입지 선정과 주민 이주, 도시관리계획 결정 등 여러 행정절차도 진행됐다. 그러나 사업을 둘러싼 지역사회의 갈등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여기에서 생곡소각장 문제를 단순히 ‘소각장을 지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로만 볼 수는 없다. 생곡은 이미 오랫동안 부산의 쓰레기를 받아온 곳이다. 그렇다면 이곳에 다시 시설을 설치하는 것이 과연 지역의 기존 부담을 고려한 결정인지, 반대로 사업을 중단했을 때 에코델타시티와 부산 전체의 폐기물 처리는 어떻게 할 것인지 함께 살펴봐야 한다. 어느 한 지역의 주민에게 부담을 떠넘기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행정절차가 있었다는 것과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입지를 결정하고 계획을 세우는 과정에서 어떤 대안을 검토했는지, 주민들에게 어떤 정보가 제공됐는지, 제기된 우려는 계획에 어떻게 반영됐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반대로 주민의 반대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필요한 시설의 건립을 무한정 미룰 수도 없다. 필요한 시설이라면 왜 필요한지, 왜 그곳이어야 하는지, 그 부담은 어떻게 나눌 것인지까지 시민에게 설명하는 것이 도시 행정의 책임이다. 물론 쓰레기를 줄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재사용과 재활용을 확대하며 생산 단계부터 폐기물을 덜 발생시키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 살아가는 한 쓰레기가 하나도 나오지 않는 도시를 만들 수는 없다. 아무리 재활용을 확대해도 다시 자원으로 돌릴 수 없는 폐기물은 남는다. 그렇다면 발생량을 줄이는 노력과 함께 남은 쓰레기를 어떻게 안전하게 처리할 것인지도 고민해야 한다. 건축과 도시계획의 관점에서 보면 폐기물 처리 시설은 도로와 상하수도, 전력 시설처럼 도시를 유지하는 필수 기반 시설이다. 하지만 다른 기반 시설과 달리 누구도 자신의 집 가까이에 들어오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소각장에는 환경과 건강에 대한 우려뿐 아니라 주변 지역의 이미지와 재산 가치, 오랫동안 누적된 지역의 부담이 함께 따라온다. 그렇다고 시설을 도시에서 멀리 떼어놓는 것만이 해답일 수는 없다. 거리를 둔다고 부담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른 지역으로 옮기면 그곳의 누군가가 새로운 부담을 떠안는다. 소비의 편익은 챙기고 폐기물의 부담은 다른 곳으로 보내는 구조는 국내만의 문제가 아니다. 선진국들은 많은 양의 쓰레기를 개발도상국으로 떠넘겨 환경오염뿐 아니라 인권 불평등의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공간적으로 멀어졌다고 해서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폐기물 처리 시설도 도시의 일부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건축은 보기 좋은 건물을 만드는 일만이 아니다. 그 건물이 도시의 다른 공간과 어떤 관계를 맺고 누구의 삶을 편리하게 하며 어떤 부담을 남기는지를 함께 생각하는 일이다. 소각장도 마찬가지다. 첨단 기술을 적용하고 안전성을 높이는 것은 기본이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시설을 받아들이는 지역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 그 지역이 감당해 온 부담을 어떻게 기억하고 보상할 것인지까지 공간의 계획에 담아야 한다. 깨끗한 도시는 쓰레기가 보이지 않는 도시가 아니다. 자신이 만들어낸 쓰레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그 처리의 부담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까지 고민하는 도시다.
[데스크 칼럼] 부산, 물 들어온다
“요즘 부산에 재밌는 일이 많이 생기는 것 같다.” “도시에 좋은 기운이 들어오는 시기인가 보다.” 이런 말들을 많이 듣는다. 도심 친수공원에 느닷없이 나타난 상어 부캉이가 단연 주인공이다. 시작은 평일과 주말, 도심과 자연 할 것 없이 곳곳에 외국인 관광객들이 보이면서부터였다. 대만 여행객들의 ‘부산병’은 처음엔 과장 아닌가 했다. 국내에서도 부산에 대한 선망을 고백하는 타지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정말 그런가 싶다. 규모 자체가 커진 K관광 중에서도 부산을 주목하는 이유가 있다면 자연 환경과 문화·관광 자원, 라이프스타일과 같은 소프트파워의 힘이다. 정부 정책이나 상업적 기획보다 부산만의 풍경, 부산만의 지역성, 부산만의 역사를 품은 콘텐츠들이 사람들을 자발적인 팬으로 만들었다. 10월의 부산을 들썩이게 한 부캉이와 부산국제록페스티벌, 부산국제영화제도 마찬가지다. 북항친수공원은 장벽 너머 삼엄한 보안 구역이던 노후 항만을 재개발한 곳이다. 피난과 파병 부두에서 경제발전 신화를 이끈 수출 역군의 현장을 지나 누구나 거닐 수 있는 친수공원으로 돌아왔다. 이곳을 20일째 떠나지 않고 있는 상어는 소셜 미디어에서 ‘부캉이’라는 이름을 얻으면서 단숨에 친근한 존재가 됐다. 부산 시민들조차 잘 모르던 ‘북항’까지 전국에 알린 건 부수적인 효과다. 20년 전 노무현 대통령이 주문한 ‘슬리퍼를 신고 가서 즐길 수 있는’ 북항 재개발의 비전이 부캉이로 실현된 셈이다. 부산국제영화제는 31년 전 ‘지방에서 무슨 영화제냐’는 냉담한 시선 속에서 아시아 대표 영화제를 꿈꾼 영화청년들의 열정에서 출발했다. 공식 약어는 영문 앞 글자를 따서 BIFF다. 처음에는 PIFF였다. 부산이 로마자 표기법상 ‘Pusan’에서 ‘Busan’으로 바뀐 뒤에도 수년간 개명을 미뤘다. 공식 명칭과 상관 없이 전국의 영화 팬들은 ‘부국제’를 호명하기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바다 어귀의 전용 상영관뿐 아니라 커뮤니티비프와 동네방네비프의 이름으로 부산 전역을 찾아간다. 지난 주말 열광 속에 끝난 부산국제록페스티벌도 있다. 2000년 제1회는 7월 광안리해수욕장에서 열렸다. 이후 다대포해수욕장을 거쳐 지금의 탁 트인 삼락생태공원으로 무대를 옮겼다. 2019년 유료화를 결정할 때는 논란도 있었다. 이제는 전국에서 4만 명 넘는 유료 관객이 몰리는 국내 1위 음악 축제로 자리 잡았다. 관객들은 특히 8년째 누적 17억 원을 후원한 부산 기업 대선주조의 소주 하이볼바나 사상구 한신2차아파트부녀회의 부추전과 소고기국밥 부스 같은 지역성에 호응한다. 물론 관광도시가 곧바로 도시 전체의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부산은 소프트파워를 활용해 관광산업을 넘어 도시 전체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 인구 정책 측면에서 보면 일자리보다 부산만의 차별화된 문화 환경과 라이프스타일을 강조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전문가를 취재한 적이 있다. 좋은 일자리가 적어서 청년이 떠나니까 대기업을 유치하고 일자리를 만드는 것도 맞지만, 가고 싶은 도시, 매력적인 도시를 만들면 사람이 모이고 그들이 창업을 하고 기업이 인재를 따라올 수도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올해 소개한 보스턴컨설팅그룹의 연구도 비슷하다. 5개 대륙 80개 도시, 약 1만 7000명을 조사한 결과 도시가 제공하는 일상 생활의 질에 만족하는 노동자가 그렇지 않은 노동자보다 직무 만족도가 30%포인트나 높았다. 소위 ‘경험 보너스’가 도시의 규모나 편의 시설의 숫자보다 훨씬 중요했고, 젊은 층일수록 더 그랬다. 보고서는 인재들은 갈수록 이미 유명한 대도시가 아니라 일상 생활이 더 풍요롭고 더 연결되어 있으며 더 개방적이고 가능성으로 가득 찬, 떠오르는 도시를 선택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에서는 콜로라도주의 인구 10만 소도시 볼더와 텍사스주의 주도 오스틴이 모델로 꼽힌다. 볼더는 로키산맥 관광의 거점이자 첨단 기술 산업과 웰빙 산업이 집중된 ‘스타트업의 성지’다. 오스틴은 매년 봄 열리는 세계 최대 규모 예술축제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SXSW)와 글로벌 빅테크 기업의 주요 사업장으로 유명하다. 일본 최초로 스타트업 비자를 도입해 청년 인구비율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린 후쿠오카도 가까운 예다. 물이 들어올 때는 일단 노를 저어야 하고, 동시에 다음 파도를 대비해 배도 지어야 한다. 공공기관을 유치하고 대기업을 모셔오는 것은 어렵고 또 중요하다. 이미 갖고 있는 부산의 소프트파워 자산과 그 토대 위에서 싹트고 있는 새로운 기회들을 놓치지 않고 키워내는 것도 그만큼이나 중요하다. 지금 좋은 파도가 물러가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중앙로365] 아이들에게 ‘공부의 기쁨’을 돌려주자
최근 우리 교육계는 거센 입시 개편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서 있다. 문·이과 통합형 수능과 고교 내신 5등급제를 뼈대로 한 28학년도 대입 개편안이 현실로 다가온 데 이어, 국가교육위원회를 중심으로 중장기 대입 개편 논의도 이어지고 있다. 수능 전 과목 절대평가, 서·논술형 평가, 수시와 정시의 통합 여부 등이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학부모와 교육 현장은 또다시 정책의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 같은 변화의 밑바탕에는 분명한 문제의식이 있다. 지금의 정답 맞히기식 교육으로는 눈앞에 다가온 인공지능 시대에 필요한 창의적 인재를 길러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입시의 틀과 평가 방식을 바꾼다고 해서 교실의 배움이 저절로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제도를 바꾸기에 앞서 우리가 ‘배움’이라는 행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부터 돌아볼 필요가 있다. 창의성 발현되는 궁극적 뿌리는 호기심 세상을 향한 의문, 알고 싶다는 갈망은 새로운 생각 싹 틔우는 유일한 자양분 스스로 묻고 오래 탐구하다가 마침내 새로운 앎 닿았을 때 번지는 환한 미소 배움을 대하는 우리 태도부터 바꿔야 ‘논어’의 첫 문장은 잘 알려진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로 시작한다. 우리는 이를 흔히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해석하고 학습의 중요성을 떠올린다. 그러나 문장의 무게중심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핵심은 ‘학(學)’이나 ‘습(習)’ 그 자체보다 그 뒤에 이어지는 ‘열(說)’, 즉 마음에 차오르는 참된 ‘기쁨’과 ‘희열’에 닿아 있다. 배움의 끝에 있는 것은 기쁨과 희열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몰랐던 세계의 문이 열리고, 풀리지 않던 의문이 풀리며, 사물의 이치를 새롭게 깨닫는 순간이 있다. 그때 찾아오는 지적 희열은 누군가에게 인정받거나 좋은 성적을 받았을 때의 만족과는 다르다. 어쩌면 공자의 제자들이 이 문장을 ‘논어’의 첫머리에 놓은 것도 배움의 본질이 지식의 축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앎에서 비롯되는 기쁨에 있음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육에서는 이 ‘기쁨’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21세기에는 생성형 AI가 인간이 오랜 시간 축적해야 할 지식을 몇 초 만에 찾아내고 정리한다. 단순한 지식 습득과 정형화된 문제 풀이에서 인간은 기계보다 효율적이기 어렵다. 그래서 교육은 최근 창의성을 강조한다. 창의성은 교과서에 밑줄을 긋거나 주입식 문제 풀이 요령을 익힌다고 해서 길러지는 능력이 아니다. 창의성이 발현되는 가장 궁극적인 뿌리는 바로 ‘호기심(Curiosity)’이다. 세상을 향해 품는 순수한 의문과 알고 싶다는 갈망이야말로 새로운 생각을 싹트게 하는 유일한 자양분이다. 호기심이라는 불꽃이 마음속에서 타오르지 않는다면 어떤 창의적 통찰도 일어날 수 없다. 우리는 누구나 어린 시절 호기심으로 가득 찬 탐험가였다. 흙바닥에 기어가는 개미 한 마리만 보아도 쪼그리고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켜보았고, 부모의 옷자락을 붙잡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왜?”라는 질문을 쏟아냈다. 세상 모든 것이 경이로웠고, 새로운 사실 하나를 깨달을 때마다 눈동자는 반짝였다. 아이들에게 배움은 고통스러운 의무가 아니라 가장 신나는 놀이이자 마법 같은 모험이었다. 그러나 학교에 들어가면서 호기심은 조금씩 사라진다. 정해진 정답을 남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찾아야 하고, 오답은 감점으로 이어진다. 질문도 교사의 의도에 맞게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아이들은 틀리지 않기 위해 남의 생각을 따라 하고, 엉뚱한 상상을 스스로 검열한다. 배움은 어느새 탐구가 아니라 경쟁이 되고, 공부는 참아내야 하는 일이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교육개혁은 평가 방식만 바꾸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서술형 평가를 도입한다고 해서 갑자기 창의성이 생기는 것도 아니며, 수능의 절대평가 전환만으로 질문하는 학생이 길러지는 것도 아니다. 새로운 평가 방식이 또 다른 ‘점수 따기 기술’로 변질된다면 교육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진정한 미래 교육은 아이들이 다시 질문하도록 만드는 교육이어야 한다. 질문은 정답을 몰라서 생기는 부족함이 아니라, 알고 싶다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배움의 문이다. 좋은 교육은 그 문을 닫지 않는 데서 시작한다. 엉뚱한 질문도 존중받고, 실패와 오답도 새로운 발견으로 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지는 교실이어야 한다. 교사는 정답을 알려주는 사람에 머물지 않고 학생의 질문을 더 깊은 탐구로 이끄는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 입시제도를 바꾸는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제도보다 먼저 바꾸어야 할 것은 배움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인지도 모른다. 공부가 고통이 아니라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설렘이 될 때, 아이들의 잠재력은 비로소 피어난다. 아이들의 눈동자에서 잃어버린 호기심을 되찾아주자. 스스로 묻고, 오래 탐구하고, 마침내 새로운 앎에 닿았을 때 번지는 그 환한 미소. 우리가 미래 교육에서 되돌려주어야 할 것은 어쩌면 바로 그 ‘배움의 기쁨’인지도 모른다.
[김필남의 영화세상] 같은 달, 다른 하늘
누군가의 삶을 카메라에 담는 일은 정당한가. 찍는 사람은 이해하고 싶어서라고 말하지만, 찍히는 이에게 그 렌즈는 견디기 어려운 시선일 수 있다. 이 간극 앞에서 근본적인 질문이 따라온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는 일이 가능한가. ‘가능한 사랑’은 바로 이 질문 위에 서 있는 영화다. 이창동 감독이 ‘버닝’ 이후 8년 만에 내놓은 영화는 다큐 감독 ‘예지’(조여정)가 해고 노동자 부부 ‘미옥’(전도연)과 ‘호석’(설경구)을 카메라에 담으려 만나면서 시작된다. 여기에 예지의 남편 ‘상우’(조인성)가 더해지면서, 서로 다른 계급에 선 두 부부의 삶이 한 화면 안에서 얽힌다. 이 만남에서 가장 먼저 드러나는 것은 현실을 대하는 두 방식의 충돌이다. 미옥과 호석은 해고 이후의 고통을 지워 내려 하고, 예지는 그 지워진 자리를 기어코 끄집어내려 한다. 덮으려는 쪽과 열려는 쪽이 마주 섰으니, 저마다 무엇을 바라는지가 궁금해진다. 연대와 투쟁을 믿었던 호석은, 정작 자신이 위험에 처했을 때 등을 보이며 달아나던 동료들의 모습이 매 순간 떠올라 고통스럽다. 조금 푼수 같은 미옥은 남편의 상황을 이해하지만, 오늘 저녁 먹을 반찬이 더 걱정인 여자다. 값비싼 가방과 옷을 걸친 예지는 그들의 현실을 이해한다고 말하지만, 그 말은 몸에 붙지 않은 옷처럼 겉돈다. 예지는 노동자의 삶에 다가서려 애쓰고, 다큐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그들의 사연에 끌린다. 그러나 그 카메라가 누구의 욕망에서 나온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노동자의 현실을 세상에 알리려는 선한 마음인지, 렌즈 뒤에 숨은 자기 갈증인지 영화는 판단을 미룬다. 이때 그들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사람이 상우다. 그는 그들과 어울리지만 한 발 떨어져 관찰하고 있고, 또 모든 조건을 마련하는 사람이다. 이 보이지 않는 힘이 영화에서 가장 기묘하고 섬뜩하다. 상우는 아내 예지가 노동자들과 처지가 다르면서도 공감하려 애쓰는 모습을 두고 메소드 연기라고 말한다. 이 말이 날카로운 것은 두 부부 사이의 거리가 마음가짐으로는 메워지지 않는다는 점을 짚기 때문이다. 이 거리를 가르는 기준은 선과 악이 아니라 서 있는 자리, 곧 계급이다. 그로 인해 호석과 미옥은 고통을 지워야 내일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의 위태로운 얼굴로, 예지와 상우는 그 고통을 소재로 삼을 여유가 있는 사람의 얼굴로 서로 다른 자리를 보여 준다. 그 거리는 미옥이 인천 월미도에서 올려다본 달과 예지가 미국 시카고에서 올려다본 달만큼이나 멀다. 같은 달이 떠 있어도, 같은 하늘일 수는 없다. 영화에서 달은 곧 시선이다. 달은 어디를 가도 따라오고, 때로는 나를 지켜 주는 것 같지만, 모든 것을 내려다본다. 지켜 준다는 느낌과 지켜본다는 사실은 한 끗 차이다. 달빛은 포근하지만 숨을 곳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달은 카메라와 닮았다. 달은 모두를 똑같이 비추지만, 그 시선 아래에서 편안한 사람과 들키는 사람은 다르다. 들키는 쪽은 가면을 쓸 수밖에 없다. 어렵게 예지의 카메라 앞에 앉은 호석이 속에 있는 말을 끄집어내며 울부짖는 장면이 처연한 것도 그래서다. 말을 쏟아내도 그 속내는 온전히 닿지 않는다.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삶을 그저 버티고 있을 뿐이다. 서로 다른 자리에 선 사람들 사이에 사랑은 가능할까.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인물들이 한 화면에서 마주하는 풍경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사랑처럼 보인다. 사랑이 상대를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라면, 그 마음은 어디서부터 진실일까. 이해하려고 다가서는 일과 내 필요에 맞게 쓰는 일 사이의 경계는 끝내 선명해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창동 감독은 이것을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것이 낙관인지, 믿고 싶은 마음인지, 아니면 역설인지는 극장을 나서면서도 내내 곱씹게 된다.
[다른 시선으로] 아이들 옷이 깨끗했던 이유
1960년 7월 20일, 나라가 4월 혁명의 잔불로 들썩이던 때, 부산 감만동에 형제육아원이 설립됐다. 형제육아원은 2년 후인 1962년 6월 9일 용당동으로 신축 이전했다. 시설의 운영 법인으로 1971년 발족한 사회복지법인 형제원은 1975년 7월 25일 부산시와 ‘부랑인 선도’ 위탁계약을 체결하고, 1976년 지금의 주례동으로 자리를 옮겨 형제복지원을 개소했다. 부랑인을 ‘선도’하고 그들에게 윤택한 삶을 보장한다는 뜻의 ‘복지’는 형제복지원 안에서 본래의 뜻과 전혀 다른 의미로 통용됐다. 그곳에 수용된 사람들은 의무교육에서 배제된 채 강제노역에 동원되었고, 이 과정에서 구타와 가혹행위, 성폭력 등을 겪었다. 사망할 경우 시신은 무연고 처리되어 암매장됐다. 이 형제복지원에 입소시키기 위한 부랑인 단속에는 경찰과 시청·구청 공무원이 합세했다. 형제복지원에서 작성한 신상기록카드에 따르면 부산역파출소와 주례파출소의 단속 실적 건수가 가장 높았다. 복지라는 이름을 걸고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었는지 의아하지만, 20세기 후반 대한민국이 ‘보호’와 ‘복지’를 명목으로 국가폭력을 일삼은 사례는 이것 외에도 더 있다. 1980년 법제화된 보호감호와 이듬해 설립된 청송보호감호소의 인권침해 실태가 그러하고, 보호감호소에서의 감금·제압 기술이 유사하게 재현된 2021년 화성외국인보호소의 미등록외국인 대상 가혹행위 사건이 그러하다. 정부는 과거 국가의 복지 의무를 주로 사회복지법인에게 떠맡기고, 법인의 파행적인 시설 운영을 묵인 또는 방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마땅히 할 일을 안 한 부작위의 책임과 더불어 천인공노할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작위의 책임을 모두 포괄한다. 부랑인으로 점찍힌 사람들을 형제복지원에 집어넣는 데 참여한 경찰 및 지방행정기관과 그들을 통솔한 한국 정부는 그 책임을 피할 길이 없다. 일제 강점기 일본군 ‘위안부’ 모집에 민간업자들이 끼었다는 이유로 일본 정부가 그 책임을 회피하지만, 여성들을 징모하고 접전 지역으로 이송하는 데 일본 정부와 군이 합세한 명백한 증거에 비추어 일본 정부가 책임을 피할 길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20세기 말 나의 양친을 비롯한 부산의 학부모들은 자식들을 대문 밖에 내보낼 때 얼굴을 깨끗이 하고 옷매무새를 바르게 할 것을 유달리 강조했다. 형제복지원 수용자와 퇴소자에 대해 지역사회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는 증언을 곱씹어보면, 그것은 그저 남에게 보일 입성을 강조한 것을 넘어 제 자식이 ‘부랑아’로 오인돼 시설에 갇힐 위험을 방비하기 위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형제복지원의 폭력에 부작위와 작위의 책임이 있는 이들은 비단 정부뿐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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