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뉴스홈 > 오피니언

사설

+ 더보기

밀물썰물

+ 더보기
동래성 전투와 인생문

동래성 전투와 인생문

1592년 임진년 음력 4월 15일 벌어진 동래성 전투는 격전이었다. 동래부사 송상현과 군민들은 고니시 유키나가와 소오 요시모도 등이 이끄는 왜군에 저항했으나 반나절 만에 성은 함락되고 만다. 왜군과 동행하며 당시의 실상을 기록한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조선군 전사자가 약 5000명에 달했다고 했다. 이는 민간인 희생자를 포함한 수치로 추정된다. 당시 동래의 군인과 성민은 3500여 명에 불과했기에, 이 중 일부는 성 밖에서 피신해 온 민간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때 겨우 목숨을 건진 군민은 극소수였다.당시 참상을 증언하는 기록은 많다. 일본 측 기록인 〈요시노 일기〉는 ‘여자, 아이, 개, 고양이까지 피를 흘릴 수 있는 것은 모두 살해했다’고 전한다. 그 참혹함은 후에 동래부사로 재직했던 이안눌의 ‘동래맹하유감’이란 시에도 잘 드러난다. ‘아비가 자식 위해 곡하고 자식이 아비 위해 곡하고….’ 시 말미에는 온 가족이 다 죽어 곡할 사람조차 없는 집이 부지기수라고 했다. 전투 중 노약자와 아녀자들은 동래성 북문과 동문 사이 고개로 피신했다. 이 고개는 사람을 살렸다고 인생문(人生門) 고개로 불렸다. 현재 동래구 칠산동과 명장동을 잇는 고개다.1979년 동래읍성 인근에서 논둑 공사를 하던 중 동래읍성 인생문을 나타내는 문명석이 발견됐다. 이 화강암에는 ‘인생문’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으며, 1700년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1731년에 인생문 성문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생사를 갈랐다는 인생문 구전은 실제 역사적 증거인 문명석을 통해 확인된 셈이다. 이후 이 비석은 부산박물관에 기증돼 줄곧 야외 전시장에 전시돼 있었다.최근 이 인생문 문명석은 46년 만에 부산박물관을 떠나 동래구 구청 유적전시관에서 전시 중이다. 이번 전시는 동래구청 신청사 개청식을 맞아 부산박물관과 협의 끝에 장기 대여 방식으로 결정됐다고 한다. 동래성 전투 후 43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 문명석을 통해 왜군에 저항하고 희생된 민초들의 얘기를 들을 수 있다. 흔히 부산을 저항의 도시라고 한다. 우리는 그 기점을 동래성 전투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 정신은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으로 이어진다. 인생문은 단순히 부산의 과거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곰삭은 부산’이 있다. 부산의 아픈 기억과, 슬프지만 왜군에 당당히 맞서 싸운 부산의 역사가 있다. 이번 전시가 부산의 역사적 자부심을 새롭게 조명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

부산일보 논설위원

오늘의 칼럼

닥터 Q

부산일보가 선정한 건강상담사

부산성모안과병원

썸네일 더보기

톡한방

부산일보가 선정한 디지털 한방병원

태흥당한의원

썸네일 더보기

가장 많이 본 뉴스